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8. 5. 1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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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했으며 서인에 속해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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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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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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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
별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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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명보, 시호 문정 |
주요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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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집》 《어록해》 |
주요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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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비문〉 〈윤영순절비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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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 동춘선생 고택 / 대전 대덕구 송촌동. 대전유형문화재 제3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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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본관 은진(恩津).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시호 문정(文正).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49년(효종 즉위) 집의(執義)로 재기용되었다.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畵)에 참여하였다가, 김자점(金自點)이 청(淸)나라에 밀고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뒤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右參贊)·좌참찬 겸 좨주(祭酒)·찬선(贊善)을 지냈고,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를 비롯, 공주(公州) 충현서원(忠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 속하여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쓰는 한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었을 때 남인(南人)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朞年制: 만 1년)를 관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문집 《동춘당집(同春堂集)》과 《어록해(語錄解)》가 있고, 글씨에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부산), 〈윤영순절비문(尹榮殉節碑文)〉(남양)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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