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태화> 승문원 정자에게 종이와 벼루를 가져오게 하다
<정태화>
승문원 정자에게 종이와 벼루를 가져오게 하다
정태화는 동래(東萊) 사람으로 자는 유춘( 春), 호는 양파(陽坡)이다. 인조 2년(1624)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인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청요직(淸要職, 홍문
관, 사헌부, 사간원의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사간(사헌부의 종3품)으로 있던 1636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의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37년 말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조 정에 돌아온 이후 1649년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 말부터는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여
러 차례 역임하였다.
혼란한 정국에 벼슬살이의 으뜸으로 평가받다
이 무렵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문제로 조정 신료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고 있었다.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져, 중진관료로서의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화가 예조·형조·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민감한 직책을 되풀이하여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주변에 적대세력을 만들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심지어는 뒷날에 사신(史臣)이“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뛰어남과 슬기로움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할 정도였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중국 명나라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를 보답하기 위하여 수시로 파견한 임시사절)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갔고, 그 뒤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에 머무르다가 효종 2년(1651)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현종 14년(1673)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하기까지 20여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정태화는 이 시기의 예송(禮訟예절에 관한 논란)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하였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나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매사에 예를 갖춰 공무에 임하다
이처럼 평생을 공직에 몸담으며 맡은 바의 직분에 성실을 다했던 정태화의 성품을 살펴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정태화가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승문원 정자(正字) 이세화가 공무로 정태화를 만나러 왔다.
정태화와 함께 일을 보던 중 글을 써서 남길 일이 있자 이세화가 하인
을 불러 명하였다.
“종이와 벼루를 가져오라.”
그런데 정태화가 다시 하인에게 명령하여 그만두게 하고는 이세화에게 종이와 벼루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정자는 스스로 가지고 오라.”
이세화는 이 일로 기분이 몹시도 상했다. 그러나 차마 정승 앞에서 반박을 할 수는 없어 일단 물러났다. 뒤에 정태화의 조카 재해를 만났을 때 이 일을 물었다.
“상공께서 나에게 하리들이나 할 일을 직접 하라고 하시니, 이는 나를 너무 낮춰 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재해가 웃으며 말해주었다.
“정승의 자리는 예(禮)가 다른 신하들과는 달라서 판서와 같은 높은 신하들도 반드시 스스로 장부를 가지고 벼루를 받들고 갑니다. 이렇게관직이 높은 신하들도 이와 같이 하는데, 하물며 승문원 정자와 같은 구품의 미관(微官)으로서 친히 종이와 벼루를 잡는 것이 무엇이 부끄럽단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이세화가 크게 놀라서 부끄러워하였다.
“시골에서 생장하여 조정의 체통에 밝지 못하더니 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저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그 뒤에 이세화는 스스로 직무에 맡는 예절과 전례를 묻고, 계속하여 삼가고 부지런히 한 것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정태화가 이세화에게 직접 종이와 벼루를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은 결코 자신이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대접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막 벼슬자리에 오른 이세화가 하찮은 일을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은 체면이 상한다고 여겨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시키는 것을 경계하고 자 하였을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 스스로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아랫사람을 부리기만 한다면 신망을 쌓을 수 없다. 정태화가 이세화에게 당당하게 종이와 벼루를 직접 가지고 오라고 명령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자신이 예를 갖춰 공무를 다할 뿐이지 사사롭게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성실히 일을 행하는 만큼 아랫사람들에게도 신임을 얻어 사람을 부림에 있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사진: 홍보담당관실 하홍순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