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경대사 자등 탑비 (보물 17
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서 있는 이 비의 글은 최언위라는 사람이 짓고, 구족달이란 사람이
썼으며 고려 태조 26년(943)에 세웠다. 법경대사는 신라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걸친 유명한 승려로써 법명을 현휘, 속세의 성은
이(李)씨이다.
대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출생하여 영각산이란 절의 심광대사에게 배워 승려가 된 뒤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고려 태조7년(924)에 귀국하여 국사의 대우를 받았다.(국사란 학식과 덕망이 높아 국가의 모범이 되는 승려에게 주던 최고의 승직으로 국왕의
스승인 왕사보다 높은 지위이다.)
후에 정토사의 주지가 되어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불교의 뜻을 가르치는데 힘쓰다가 고려 태조
24년(941)에 63세의 나이로 승려가 된지 41년만에 입적하였다. 시호를 법경,탑명을 자등이라 내렸다. 비의 글을 지은 최언위는 태자의
스승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며 글씨를 쓴 구족달은 중국의 명필인 구양순체를 익힌 당대의 명필이고 이비석의 조각은 다른 비석과는 달리
승려 넷이서 조각하였다.
이 비석은 화강암으로 높이 3.15m, 폭
1.45m이다. |
국보
6호 중앙탑(탑평리 7층석탑)
◆ 위 치 :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번지 |
탄금대에서
창동을 지나 가금면을 향하면 탑평리에 이르게 된다.탑평리는 태초이래 이 고장 문화의 젖줄기 역할을 해온 남한강변에 인접한 마을인데 여기에 천여년
세월을 강물의 흐름을 지켜보며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있는 대형석답을 보게된다. 이 지방에서는 흔히 중앙탑으로 불려지고 있는 7층의 이 석탑은
중원지방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 유산이다. 이 탑은 현재 국보 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탑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하나는 이 곳 충주에 왕기가 있다고 하여 이를 제압코자 이 탑을 건립했다고 하며, 또 하나의 설에는 신라 때 고승인
김생이 이웃 반송산에 사찰을 건립하고 고대의 참고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건물을 짓고 탑을 세웠다하며, 마지막으로 통일신라 원성왕 때 신라의
중앙을 표시하기위해 같은 보폭을 가진 건각자( 걸음을 잘 걷는 사람)를 남과 북에서 동시에 출발시키면 꼭이 곳에서 만났기에 이 탑을 세워 신라
국토의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탑의 건립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으나 탑의 조성양식을 보아 전설이 유래되는
원성왕 때인 8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14.5m의 웅장한 이 탑은 전체가 7층으로 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과 양화까지잘
보존되어 있고 기단부에는 양 우주외에도 4개의 탱주를 세우고 있으며 탑신부는 몇 개의 석재로 조립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과 옥개석의 높이와
폭이 좁아지는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이루어 져 있고 옥개석 각 층 마다 낙수홈이 파여져
있다.1917년 이 탑을 해체 보수할 때에 제6층의 탑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사리공내에서 은으로 만든 사리병과 그 안에서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 발견되었고 경판이 2매가 출토되었는데 이 경판은 고려경(高麗經)으로서 탑의 창건 후 2차적인 사리장치를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 탑의 주변일대가 절터로서 많은 석조물 등이 파손되어 산재해 있으며 특히 고구려 계통의 양식을 가진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수 많은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고 학계에 주목 받고 있으나 사찰명과 창건연대를 규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명문와당(글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아 아직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중앙탑은 국내에 현존하는 통일신라 석탑으로 가장 큰
규모의 석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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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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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 정혜원 융탑( 국보 197 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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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도는 고려말의 고승인 보각국사(1320-1392)의
묘탑이다. 편평한 대지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1단의 축대를 쌓고 그 중앙에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건립 하였다.
기단부는 복련을
새긴 하대석 과 안상안에 사자상과 운룔문을 새긴 중대석,그리고 앙련을 새긴 상대석으로 이루어졌다.탑신부는 반룡이 감긴 엔타시스의 우주를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창방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각면에는 무기를 든 신장상이 1구씩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밑면 처마에 탑신
우주위에 창방머리와 접촉되는 부분이 보머리형으로 이루고 있으며 추녀와 사래를 양각하였고 연화문을 조각하였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상단부가 급경사이며 기왓골은 없으나 각 함각마루에 용두를 조각하였다. 옥개석정상에는 복련을 조각하여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복발,
보륜,보주가 남아있다. 탑신 우주의 엔타시스와 창방의 조각,옥개석의 보머리형조각, 추녀와 사래의 표현, 지붕 합각부의 용두 조각등은 당시의
목조가구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의 앞에는 배례석이 있고 주위에 탑비 와 사자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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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 부락에 있는 이 비석은 1979년 충주
지방의 문화재 애호 단체인 예성 동호회에서 찾아내어,단국대학교 박물관의 학술 조사단에의해 확인된 고구려 시대의 비석이다.
비석의
높이 1.44m,폭 0.55m---0.59m이고,두께는 0.37-0.38m인데 화강암으로 만들어 진 비석이다. 1981년 3월1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석의 모양이나 새겨진 글씨체와 형식으로 보아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와 비슷하며, 4몀 모두에 극씨를 새긴 비석이다.
비석의 앞면은 10행 23자이고,왼쪽면은 7행 23자로 보여진다.
비석에 새긴 글씨는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어서 모두 읽을
수는 없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화해를 한 기념으로 이 곳에 세원 진 듯하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을 하면서 고구려가 형님이되고 신라가 아우국가가 된다는 기록과,고구려의 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조령과 죽령에 이르게 된 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장수왕 때의 업적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며 당시 영토 확장에 대한 정계비(국경을 정하여 적은 비석)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비석의 중요성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가 전달되는 과정을 연구 하는데에도 있다. 비문 중에 고구려가 신라에게 의복을 준다는 내용도 있는데,
의복외에도 관리의 명칭이나 제도가 이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충주중원지방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은 옛날의
기록에도 있으나 이 비석으로 인하여 다시 확인되었고 이 비석이 서 있는 곳이 고구려와 신라를 통하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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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정사 대지국사비 (보물 16 호)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소재하고 있는 이 비는 조선 태조
2년(1393년)에 의정대부 박의중이 쓰고 승려 혜공이 조각하여 동 년 10월에 중원이 세운 것이다.
국사의 법명은
찬영,자는 고운이며 속성은 청주 한씨로서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에 출생하였다.14세에 중흥사에 들어가 원광국사에게서 5년간 법을
배우고, 26세에 승과에 장원하였다. 32세에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양가도승록 대사가 되었다가 수년 후 특명을 받아 석남사,월남사,신흥사,운문사
주지등을 역임하고 45세에 왕이 내원으로 맞아 들여 "정지원명"(국일선사)이라고 호를 내리고 가사를 하사하였다. 47세 때 공민왕이 승하하자
속세를 피해 생활하려 하였으나 새로운 왕이 만류하고, 왕명으로 "대선사"를 하게 되었다.
50세에 보개산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가지사와 태자산 주지를 하였으나 모두 왕의 뜻에 의한 것이 었다. 56세에 왕사로서 조계종 존자라 명을 내리고 억정사에 맞아들이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증흥사에 원중국사비를 세웠고 58세에는 왕이 광명사로 맞아 들였다.
신왕이 즉위한 후에도 전번
임금의 대우와 같이 섬겼으며, 같은해 10월 흥성사로 옮긴 뒤에 왕명으로 "억정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공양왕2년(1390년)에 63세로
입적하였다 왕은 지감국사라는 시호와 함께 탑의 이름을 혜월원명이라 하고 후하게 장사 지내었다.
이 비석은 간단한
것이 특징이다. 비석의 덮개없이 비의 위쪽 좌우만 약간씩 잘라내는 형식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를 거치는 과도기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비의 글은 비석 4면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고,끝에는 국사의 동문들과 속세의 문도이름 및 충주목사까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광범위한 체제로 비석이 세워 졌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높이는 290cm이고, 폭 125cm, 두께25cm의 광해석으로
만들어 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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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빈신사지 석탑(보물 94 호)
◆ 위 치 : 충북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
국립공원) |
송계계곡 팔경중 하나인 '와룡대'에서 조금 내려와 왼쪽으로
들어서면 고려 시대 사찰인 사자빈신사 절터가 나오며, 보물 94호인 사자빈신사지 석탑이 가지런히 정리한 절터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고려 현종 13년(1022년)에 세워진 이 석탑은 기단부의 상대를 보통 탑과는 다르게 돌사자 4 마리가 떠 받친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 9층석탑이었으나 3층 까지만 남아 있고 갑석을 떠 받치고 있는 4마리 사자상 가운데에 좌상 '비로자나불'을 안치한
것이 특이하다. 이런 유의 석탑과 비슷한 것이 가야산 화엄사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탑은 기단하부인
지대석을 8각석재로 대치함으로써 이형적인 인상을 주고 있는 석탑이다. 현재 지대석 위에 방형하대가 놓여 있고 상부에 두꺼운 테를 돌려 부연을
삼았으며, 그 밑각면에 3개씩의 안상(眼像)을 새겼다. 안상안에는 꽃 모양을 새겨 고려시대 수법을 나타내고 있고 중석의 4면에는 넓은
우주형을 새겼으며 이 곳에 79자의 명문을 새겨 확실한 연대를 알게 하였다. 특히 상층기단의 중석은 가장 특색있는 부분으로 네 귀에 네
마리의 사자를 앉혀 갑석을 받치고 중심에는 '비로자나불좌상'을 안치한 특수구조로 되어 있다.
갑석의 위 네모진 면에는 16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1층탑신은 특별히 크고 2층부터는 급격히
작아졌다. 옥개석은 4층까지 남았는데 평박하며,받침은 3단이다.또한 추녀의 우각은 크게 반전하였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다. 원래
9층이던 이 탑은 현재 5층이상 상실되었으나 고려 시대 석탑을 여전히 잘 보여 주고 있다.명문에 의해 고려 현종13년(태평 2년 102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건실한 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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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리 5층 석탑 (보물 95 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는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굴사원인 미륵당이 있고 석굴사원의 주실에는 3면의 벽석안에 독립된 미륵석불입상 1구가 중앙에
안치되어 멀리 월악산의 마애불상을 응시하는 듯 한 시선을 주고 있다.
석굴의 주실 앞에는 역시 갗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 지는
8각 석등이 있고 석등의 전면에는 미륵리 5층석탑으로 알려진 석탑이 1기가 존재하는 단탑가람(사원)배치의 형식을 갖춘 사지가 있어 일찍부터
석굴사원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발굴과정을 통해 많은 유구와 유적이 발견되어 이 미륵당이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석굴사원일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과 같이 더운 기온을 피하기 위하여 석굴에 사원을 만들지만 우리나라에는 석굴사원과 같은 양식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한다. 다만 경주의 토함산 석굴암만이 유일 무이 하다고 했는데 미륵당 역시 석굴사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미륵리 5층석탑은 높이 6m의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했으며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지대석으로
사용하였고 지대석과 기단부가 커다란 자연석1매로 조성했으며 기단부의 내부를 일부러 파 내어 4면의 벽석을 만든 형태로 되어 있다. 탑신부는
높지 않고 옆으로 넓어진 방형중층의 양식을 갖춘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볼 수 있으나, 흔히 석탑에 표현되는 우주와 탱주가 나타나 있지
않고 상층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덮여 있고 탑신부에는 초층 옥개석이 2매이고 탑신이나 옥개석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고 옥개 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세련미가 부족한 듯 보여지고 있으나 상륜부에는 큼직한 노반이 있고 정상에는 철제로 만든 철주가 남아 있어
또 다른 계의 신라말 고려 초의 석탑 구조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탑의 미륵불은
통일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관계가 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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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리 석불입상(보물 96 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는 높이 9.8m의 거대한 미륵입상이 있는데 건립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언제 건립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에 미륵대원등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저자인 일연 스님이 살았던 시대 이전에 만든 것은 확실하니,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륵불상이 직립하여 있는 둘레 3면이 석굴로 되어 있고 석축내에는 강실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이 국내에서 하나 밖에 없는
석굴사원이 아니냐 하는 많은 논란이 있다. 1963년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복원할 때도 미륵당의 전실 평면을 참고 하기도 하였다.미륵당의
미륵불상은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에 입산도중 이곳에 들러 사찰을 건립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현재로 보아서는 고려 시대의 사원으로 보고 있다. 대개가 석굴안에는 좌상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데 이 미륵당
석굴에는 높이가 9.8m의 석불입상을 세우고 불상전면을 제외한 3면에 높이 6m의 석축을 쌓아 놓았는데 특이한 것은 이 석축은 불에 심하게 타서
돌이 탄 흔적이 역력하여 석축에 조각된 불상의 모습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화상과 손상이 되었는데 본존불상인 미륵입상 두상부분은 전혀 불에 탄
흔적이 없이 매끄러운 형태로 남아 있어 많은 의문점이 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화재로 손상된 얼굴을 파불 처리하고 새로
조성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석불우측 3백m지점에 파불이 거꾸로 쳐 박혀 있는데 이 또한 깨끗하다는 점에서 더 더욱 신비롭다. 신라 56대
경순왕 말년 마의 태자 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금강산으로 피신하는 도중에 미륵사와 더불어 세웠다고 하는 전설은 있으나 고려시대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조성된 일련의 거불들과 양식적인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이다. 모두 5매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고 1매의 얇은
돌로 갓을 삼았으며 높이가 10.5M의 거대한 불상이다.
육계와 나발이 있고 얼굴은 둥글고 평판적이며 둥근 눈섭과 직선으로 감은
듯한 눈을 표현한 것이나 적은 입을 두텁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 몸체에 비해 얼굴 부분을 무척 정성을 들인 것 같다.
몸체의 표현은
목은 굵고 3도는 간신히 표현되었으며 어깨에서 발끝까지 같은 넓이로서 마치 판석을 이룬 듯 만들었고 팔은 형체만을 겨우 나타냈고 오른 손은
가슴에서 펴고 있는 시무외인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왼손은 약함같은 것을 들고 있는 것이 분명하여 이 불상을 약사 여래 입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평평한 안면이나 어깨부터 일직선과 다름없이 표현한 불신이나 하체에서 보이는 약체성등을 보아서나, 8각석등 중대석 과 5층석탑에서
보이는 시대성을 종합할 때 고려초기인 10세기에 창건되었으리라 추정한다.
한편으로는 신라가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넘는 죽령
바로 밑에 보국사를 창사하고 장육불을 세웠던 것과 같이 한훤령을 넘어 계립령 밑에 미륵당을 세우고 거대한 미륵불상을 조성한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군사적 교통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이 커다란 사찰의 이름을 왜 미륵당이라 했는지 그것
또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분명히 절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암자와도 같은 이름의 미륵당이란 명칭만 남아 있는 것 하며, 신라말 고려초 이와
같은 거대한 석불입상임에도 불구하고 나말여초의 중앙 세력들이 대개 믿던 관음상이나 아미타상이 아닌 미륵불이라는
점이다.
미륵신앙은 원래 불교적이라기 보다는 한반도적 토착신앙의 요소가 강하다.주 신앙 층들은 귀족 중앙세력이 아닌
가난한 민중들이 였으며, 대개 석가상, 관음상, 아미타상이 아닌 미륵불을 숭배 하였으며, 규모 역시 바위 귀퉁이에 엉성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
고작이나 미륵리 석불입상 처럼 웅대한 미륵불은 희귀한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석불입상은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덕주사 마애불 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마의 태자의 전설이 스며 있는 이유 역시 이러한 모습 때문이 아닌가
한다. |
 미륵리 석불입상
 석불입상 파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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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주사 마애불을 응시하고
있는 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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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원풍리 마애불 좌상(보물 97 호)
◆ 위 치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3번국도
옆 |
충주에서 문경으로 가는 3번국도를 따라 수안보를 거쳐
조령 3관문 입구를 지나자마자 우측편으로 보물 97호인 원풍리 마애불좌상이 있다. 12m화강암 벽에 2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하여
2체불이라고 하는 이 마애불좌상은 5m의 깍아 지른 듯한 암벽에 3m65cm의 사각실(寺閣室)안에 조각된 2게의 좌불상을 말한다. 이
마애불좌상은 신라말기 금정산 범어사의 고승 여상조사(呂尙祖師)가 만들었다고도 하고 고려시대 전라도의 나옹대사(羅翁大師)가 절을 세울 자리를 찾아
전국을 헤메던 중 이 곳에 이르러 계곡 물 맛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처음 맛보는 생후일미(生後一味)라 하여 수원지인 신풍리 절골에 상암사라는
절을 짓고 평생 도를 닦았다고 전한다.상암사는 6.25때 불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2체불은 코가 떨어져 없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중국의
이여송이 부처 모양이 장사처럼 되어 있어 이 곳에서 많은 장사가 나겠다고 생각, 조선 정기의 혈맥을 끊기 위해 코를 떼어 갔다고 하나 남아선호
사상이 대단했던 조선조 우리나라 여인네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떼어갔다는 얘기도 있다. 이 불상에 흉터가 많은 것은 동란 뒤
미군들이 이 곳을 지나다 좌불을 표적 삼아 마구 총질을 해 생겼다고 전해진다. 불상 바로 옆 도로 건너에는 조령3관문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모여 폭포를 이룬 수옥정 폭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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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철불좌상(보물 98 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지현동
대원사 |
충주시
지현동에 위치한 대원사 대웅전 앞에 안치된 이 철조불상은 원래 충주공고옆 자리에 오래 방치되었던 것을 일시적으로 옛날 중원군청으로 옮겼다가
1959년 현 장소로 이전했다고 한다.
이 철조불상의 원위치는 안림동에 있는 전대궐터로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 확실한
실마리가 풀어지지는 않고 있다. 이 철불상은 대좌와광배 그리고 양손목을 잃고 있으나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불상으로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98cm이며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얼굴 전체의 크기에 비해 코가
작고 인중이 짧고 입술이 도톰하게 표현되어 입가의 자비스런 미소는 찾을 수 없는 데다가 반원형으로 그어진 눈썹 밑에는 반쯤 떠진 눈의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게 표현되어 인상이 험악하다고 할 정도로 근엄함을 풍기고 있다.
목에는 3도의 표현이 있으며 법의는 통견이며
흉전앞에 옷자락 매듭을 만들고 옷의 주름은 팔에서부터 3줄의 사선을 그어 가슴 밑으로 U자형을 이루었다. 불상전체의 크기에 비해 비교적
넓고 높게 만들어진 무릎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으나 옷자락의 표현이 간략하게 되어 있고 인체 묘사가 둔화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특히 두 다리는
수평으로 평행선을 만들었고 무릎 밑에서 올라간 굵은 3줄의 음각선과 무릎사이의 삼각형의 옷주름 표현은 이 지방 철조불상에 나타나는 특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보물98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단호사의 철불(보물 512호)과 그 모습이 너무도 꼭같음을 볼 때
이러한 양식들이 11세기 중엽 이 지방 불상 조성의 지방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예가 되고 있어 더욱 귀중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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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사 마애불 (보물 406 호)
◆ 위 치 : 충북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
국립공원) |
덕주사에서 넑적한 바위로 메운 산길을 따라
1.5KM쯤 오르다 보면 보물 406호인 마애불이 있는 곳에 닿게 된다. 송계리 산 1번지에 있는 이 마애불은
폭5.4m,얼굴길이 3.73m를 포함, 길이가14m이며,귀의 길이가 1.85m,발의 길이가 7.5m나 된다. 미륵리 석불입상과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인 경덕왕(통일신라 마지막왕)을 그리워 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 암벽에 세워 조각되어 있으며 얼굴이 선각(線刻)에 가 까운데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얼굴은 살이 올라
있는 긴 형이다. 두눈은 반쯤 떴고 미간에는 백호(白毫)가,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입술과 귀는 두텁고 넓은 편이다.커다란 코와 눈,
축 늘어진 턱이 살이 오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아래서 절을 하면 올려다 보는 참배자의 입장을 고려한게 아니가 싶다. 상반신과
하반신과의 비례가 맞지 않고 힘이 빠진 듯하고 발가락이 턱 없이 크다. 법의는 축 늘어져 배 앞에서 둥근 활 모양을 그리고 있고, 선으로
새긴 옷 무늬는 도식적이며,두 다리의 무릎에는 치졸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동심타원의 옷 무늬가 있다. 머리 부분의 양쪽 암벽에는 네모형의
몇 개 구멍이 있어 조성 당시 목조건물을 세웠던 것이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마애불 바로 앞 자리가 옛날 덕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과거 이곳에 있던 덕주사는 묘향산의 절을 지은 목수가 지었다고 하는데 많은 목수들이 절의 건축공법을 알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6.25때 공비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 하여 아군이 포격으로 없애 버렸다. |
 덕주사 마애불
 덕주사 마애불
 옛날 덕주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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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원 융탑 사자석등(보물 656 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
 |
조선왕조 태조 3년에 왕명으로 세원진 보각국사비와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함께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된다. 석등의 하대석은 희귀한 예로서 경주 남산 천룡사자귀부와
같은 형식으로 한마리의 사자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다. 간주석을 비롯하여 화사석 옥개석은 방형으로 고려이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조형미가 부도와는 수법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 조선 중기의 것으로 정혜원 융탑이 조성된 후에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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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 비 (보물 658 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 |
고려 공민왕과 공양왕 및 조선 태조의
국사로 있던 고명한 승려인 보각국사의 공적비이다. 문인선사 희달이 태조 3년(1394년)에 태조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비문은 풍우로
인하여 손상이 많이 되었다. 보각국사는 경기도 사람으로 성은 조씨이며,법명은 혼수이다. 고려 충숙왕 7년에 출생하여 우왕때 국사가 된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존경을 받았던 덕이 높은 분이었다. 대사가 돌아가신 후 태조 임금이 슬퍼하며 내린 시호가 보각이고, 탑의
이름은 정혜원 융이라 하였다. 이 비석은 윗 부분의 양면을 접은 간략한 형태로 고려 말기 비석의 형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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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리 마애불상(보물1401호)
◆ 위 치 :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
78년 12월 1일 가금면 봉황리 중턱에서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던 삼국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상군은 봉황리
내동(안골마을) 햇골산 중턱, 놀이 약80m 지점에 깍아지른 절벽위에 정면 동쪽을 향해 모두 8구의 불상들이 양각되어 있는데 본존불상이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반가사유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특히 마애반가사유상은 지금까지 경북 영월군 단석산과 충남서산의 3존 마애불상의 2개의
예가 있을 뿐이며 한강유역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봉황리 마애불상은 햇골산 동쪽에 높이 1.7m 너비 약5m의 넓다란
바위에 한줄로 나란히 8개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1.4m높이의 반가사유상은 양쪽에 협시보살을 거느리고 있으며 왼쪽에는 따로 3존보살 불상이
배치되어 있고 왼쪽의 끝에 여래좌상이 있고 그 옆에는 여래상을 향하여 한쪽 무릎을 꿇고 한손에 보주를 받치는 보살의 측면상이 조각되어
있다.  주존불이 되는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이후론 잘 만들지 않던 불상으로 한쪽다리를 결가부의 자세에서 풀어 내리고 한쪽 손은 턱에
대고 깊이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말하는데 이 반가사유상은 머리가 떨어져 나갔으나 복련의 대좌위에 걸터 앉은 형태이고 천의 자락과 구슬 줄인
영락등으로 장식하고 있어 조각양식이 아주 고식임을 짐작케 한다. 한편 반가사유상 옆의 협시보살들은 높이가 0.7m-1.2m로서
머리에는 산모양의 삼산화관을 쓰고 있으며 좌측의 여래좌상은 높이 0.61m로서 어깨가 당당하고 눈두덩이 붓도록 조각하고 불상의 밑바탕이 연꽃으로
돌려져 있는 등 삼국시대 금동불상의 양식을 갖추고 잇다. 이처럼 8구의 불상이 새겨진 것을 보는 순간 조각이 아니라 마치 바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죽령을 넘어선 한강유역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충주가 옛 고구려의 국원성을 불리웠고
남하정책의 전진기지였던 이곳에서 삼국시대의 마애불상이 발견된 것은 대륙으로부터 남쪽으로 문화전래라든지 불교의 전래경로를 규명하는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며 삼국시대에 있어서 충주가 전략상 교통상의 중요지점은 물론 문화전파의 중계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1000여년의 신비를 머문 채 햇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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