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古書)

원주이씨족보8책중6책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7. 9. 2. 17:05

 품      명     원주이씨세보(原州李氏世譜권지1.3.5.6.7.8)8책중6책
크      기      23.6*37쎈치 목활자
주      기     甲寅 仲春 砥平開刊(1854년)

>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원주(原州)는 강원도 원성군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평원군이라 불렸고,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 원주로 고쳤다.  그후 일신현,·정원도호부,·익흥도호부,·성안부 등으로 변천해오다가 1353년에  원주목(原州牧)으로 하였다.

 

     원주이씨(原州李氏)의 시조 이신우(李申佑)는 신라의 전신인 진한 양산촌장 표암공 이알평(李謁平)의 원손이며 소판공 이거명(李居明 : 경주이씨의 일세조)의 12세손으로 문종조에서 병부상서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경흥군에 봉해졌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신우(申佑)를 시조로 받들고 경주이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원주로 삼게 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판도공파(版圖公派), 월성군파(月城君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 종파), 시랑공파(侍郞公派 : 뒤에 경원군공파와 강릉공파로 분파됨) 등 크게 네계통으로 갈라져서 세계를 잇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의 13세손 반계(攀桂)가 은청광록대부로 신호위 영중랑장을 지내고 예부상서에 올랐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망국의 한을 안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태종과 친분이 두터웠던 반계는 누차 영상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거절하자, 태종이 그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7일만에 <은(殷)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누구의 녹(祿)을 먹겠는가(殷室己喪誰粟司食)>하며 세상을 떠나니,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긴 왕이 영의정에  추증하고 경원군에 추봉하였다.

 

     반계의 아들4형제 중 장남 [이]는 정주학(程朱學)에 정통한 유학자였으나  태종이 홍문관 대제학의 벼슬을 내려 관직에 오를 것을 종용하자 자식들을 불러놓고  "충효(忠孝)는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다.  일찍이 아버지께서 벼슬을 버리시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순사(殉死)하셨으니 내가 벼슬에 나가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어찌 신자(臣子)의 도리라 하겠는가" 하면서 음독자결하여 충의의 가통을 지켰다.  

 

     반계의  둘째 아들인 견(肩)은 정산 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그의 청백한  치적을 영원하게 기리기 위하여 <영사불망철비(永思不忘鐵碑)>를 세웠으며,  그의 묘소가 있는 여주군  북내면 운촌리는 그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견의 아우 요(腰)족(足)도 모두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은 이들 형제를 <일문사충(一門四忠)>으로 일컬었다.  

 

     반계의 아우 을계(乙桂)의 후손에서는 손자 영화(永華)가 유명했다.
     그는 감찰, 직산  현감을 거쳐 단종때 강릉 대도호부사로 나갔으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린후 홀로 해남의 무진산에 산막을 짓고  세상을 등지며 은거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절의를 숭모하여 산막이 있었던 마을 이름을 산막리라 하며 그의 묘소가 있는 산 이름을 이영산이라 부르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주이씨(原州李氏)는 남한에 총  13,248가구, 56,0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