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古文書)

東牘 조선후기 정승들의 서간문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8. 1. 13. 16:33

 음성기록역사관소장

 

정원용 [, 1783~1873]
요약
조선 후기 문신. 중추부영사 · 총호사 등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맡아 보았으며,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으로《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했다.
본관 동래
경산
별칭 자 선지, 시호 문충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경산집》 《황각장주》
본문

본관 동래(). 자 선지(). 호 경산(). 시호 문충(). 1802년(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검열·대사간 등을 지내고 1821년 관서위유사(西使)로서 평안도의 민폐 실정을 조사·보고하였다. 1831년 동지사(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승진한 뒤 이조판서를 거쳐 1841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영의정으로서 강화에 사는 덕완군() 원범()의 영립()을 주장, 철종()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그후 중추부영사·총호사(使) 등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맡아 보았으며,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저서에 《경산집()》 《황각장주()》 《북정록()》 《문헌촬요()》 《수향편()》 등이 있다

 

조두순 [, 1796~1870]
요약
조선 후기 문신. 《헌종실록》편찬에 참여하고《동문휘고》찬집당상을 역임했다. 총재관이 되어 삼정의 개혁에 주력하고,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얻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영의정에 올라 삼군부를 부활시켰으며, 경복궁 영건도감의 도제조를 겸하고《대전회통》을 간행했다.
본관 양주()
심암()
별칭 자 원칠(), 시호 문헌()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심암유고(稿)》
본문

본관 양주(). 자 원칠(). 호 심암(). 시호 문헌(). 1826년(순조 26) 황감제시()에 장원,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규장각 대교()를 거쳐 1830년 승지를 지내고, 1834년 대사성에 승진, 다음해 동지부사(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0년 이조참판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1841년 공조판서에 이어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1848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 예문관대제학으로 실록청 도청당상()이 되어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해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문()을 찬()했으며, 1851년(철종 2) 《동문휘고()》 찬집당상()을 역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 ·중추부지사()가 되고, 1853년 우의정에 승진, 1858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1862년 이정청()의 총재관()이 되어 삼정()의 개혁에 주력하고, 조대비흥선대원군의 신임을 얻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1864년(고종 1) 《철종실록()》 편찬 총재관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삼군부()를 부활시켰으며, 경복궁 영건도감()의 도제조(調)를 겸하고, 《대전회통()》을 간행하였다. 대원군의 명으로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으며, 1866년 기로소()에 들어가고, 1869년 봉조하()가 되었다. 문집에 《심암유고(稿)》가 있다.

 

김병학 [, 1821~1879]
요약
조선 후기 문신. 융통성이 많고 평소 흥선대원군과 가까웠으므로 이조판서, 뒤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실록총재관으로《철종실록》과 찬집소 총재관으로 《대전회통》을 각각 완성했다. 보수적 척화론자로서 병인박해 때 천주교 탄압을 적극 주장하였다.
본관 안동
영초
별칭 자 경교,시호 문헌

본관 안동. 자 경교(). 호 영초(). 시호 문헌(). 이조판서 수근()의 아들. 1853년(철종 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 ·사간이 되었다. 안동김씨세도정치 아래에서 대사헌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안동김씨 일문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융통성이 많고 평소 흥선대원군과 가까웠으므로, 1864년(고종 1) 이조판서, 뒤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을, 찬집소()총재관으로 조두순() ·이유원()과 함께 《대전회통》을 각각 완성하였다. 보수적 척화론자로서, 1866년 병인박해천주교 탄압을 적극 주장하였다. 영의정을 거쳐, 1875년 돈령부영사가 되어 한일수호조약 체결을 극력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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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민(李興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1864년(고종 1) 대사헌이 되었으며, 그해 7월 동의금부사를 지냈다.

1865년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문관제학을 지냈으며, 같은해 6월 행호군에서 정경(正卿)으로 승탁(陞擢)되었다. 이어 같은달에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6년 다시 홍문관제학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같은해 12월에는 근정전의 현판서사관(懸版書寫官)이 되기도 하였다.

1867년 함경도관찰사에 제수되어 1870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1870년 9월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김병기 (金炳棄)

 
1818(순조 18)∼1875(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 아버지는 판돈령 영근(泳根)이다. 영의정 좌근(左根)에게 입양되었다.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대사성이 된 뒤 1850년 이조참의·실록청수찬관(實錄廳修撰官)·규장각직제학·예조참판, 1851년에 이조참판, 1852년에 대사헌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재정이 고갈상태임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줄 것을 청하였다.

1853년에 총융사(摠戎使)·훈련대장·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공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호조판서, 1860년 금위대장·어영대장을 지냈다.

1862년에는 삼남지방으로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민란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설치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구관당상(句管堂上)이 되었다.

철종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이조판서·어영대장·판돈령부사직을 2차례, 호조판서직을 5차례나 거치는 등 관력(官歷)이 화려하였으나,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집정하자 1864년(고종 1) 판돈령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 등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요직에 기용되어 1865년 병조판서·의정부좌찬성, 1866년 공조판서·예조판서, 1867년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문근(汶根)의 조카로 성격이 호방하여 문근의 사랑을 받았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한창일 때에 초야에 있던 흥선대원군과 교유하여 뒷날 흥선대원군 집정 때 안동김씨일파가 대부분 제거되었을 때도 여전히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저서로 《사영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이돈우초명은 돈영(敦榮).  1801(순조 1)∼1884(고종 2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돈영(敦榮). 자는 범약(凡若) 또는 윤공(允恭), 호는 신게(莘憩). 득일(得一)의 손자로, 첨지중추부사 상두(相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선(金思善)의 딸이다. 상형(相衡)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으며, 곧 홍문관제학이 되었다.

1831년 도청(都廳)을 역임한 뒤, 1836년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집의가 되었다.

그뒤 1840년(헌종 6)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843년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판에 다시 등용되고 1845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849년(철종 즉위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853년 공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855년 예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57년 다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58년 이조판서가 되고, 1860년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1년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각지에서 발생하는 민란수습에 전력하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듬해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鄭基世  1814(순조 14)∼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구(聖九), 호는 주계(周啓). 영의정 원용(元容)의 아들이며, 우의정 범조(範朝)의 아버지이다.

1837년(헌종 3) 정시(庭試)에 병과로 급제,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응교·규장각직제학·이조참의를 지냈다.

1853년(철종 4) 강화도 조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하여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의정부좌참찬·예조판서를 지냈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형조판서로서 이정청당상(釐整廳堂上)이 되었다. 고종 즉위 후 더욱 중임되어 권강관(勸講官)·병조판서·한성부좌윤·철종실록찬집당상·제학·우찬성을 역임하였고, 《대전회통》 편찬을 위한 교식찬집소(敎式纂集所) 교정당상(校正堂上)이 되었다.

신미양요 때에는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각조의 판서·제학·시강원 빈객을 지냈다. 임오군란 전에 수원유수로 있다가 난이 수습된 뒤에도 요충지라고 유임되었고 한성부판윤으로 전임되었다.

제술관(製述官)문서사관(文書寫官)에 몇 차례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아 문장과 서예에 조예가 있었던 것 같다.

성격이 겸손하여 다른 사람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고 기쁜 일을 잘 알려주어 까치판서라고 불렸다.

 徐憲淳

1801(순조 1)∼1868(고종 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치장(稚章), 호는 석운(石耘). 진사 기보(基輔)의 아들이다.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4년(헌종 10) 성균관대사성에 취임하였고, 3년 후 관북지방에 흉년이 들자 구제사업을 위하여 파견되었으며, 1850년(철종 1) 사은부사(謝恩副使)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호군(護軍)·공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85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조판서, 1857년 이후에는 한성부판윤·형조판서·사헌부대사헌, 다시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2년 사은정사(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해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와 교도 20여명을 붙잡아 의정부의 지시방침에 따라 처형 또는 처벌하였다. 그뒤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사를 다스림에 청렴결백하며, 일의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재주가 신과 같았다.

예문관제학과 여러 아문의 제조(提調)를 지내고, 1867년(고종 4) 휴가를 청하여 공주의 자운동(紫雲洞)에 은퇴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를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그해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