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보전에 관한 小考
1..문화재의 의미
문화재란 문화적 가치와 역사성을 가진 유,무형의 소산물을 말한다.문화재 보호법에 의하면 유무형의 문화적 가치가 높은 지정문화재,기념물(천연기념물 포함),민속자료등을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정의하고 있다.대체로 문화재와 관련된 사항은 문화재 위원회에 의해 문화재 지정 및 해제,보존지역설정,수리 및 보수의 명령,현상변경,이전,매장문화재 발굴등의 문화재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를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게 되어 있어 그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화재란 의미가 재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사고 파는 가치기준에 의해 정해진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대부분의 나라가 culturural heritage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유네스코조차도 세계문화유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이러한 material의의미를 가진 문화재란 지금에와서는 적합치 않은 용어이므로 이의 개념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문화유산에 관한 밀거래가 모든 나라에서 이뤄지지만 우리나라처럼 공공연히 거래가 성행하는 나라는 드물다.지금도 도굴이 성행하고 있고 서원이나 향교의 현판이 없어지고 사찰이나 개인소장품이 없어져 버젖이 거래가 이뤄지는 것을 보면 문화유산이란 것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적인,고고자료적인,인류문화의 시금석이 되는 자료적인 가치보다는 거래에 따른 물적수익이라는 측면에서 인식된다는 것이 심히 아쉬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화유산을 정의해 보면 “문화유산은 보편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 탄생된 문화적 가치가 높은 유무형의 유산뿐 아니라 생활전승유산을 포함한 정신적 소산물 총칭한다.” 따라서 문화유산은 법적인 지위에 있는 유무형의 문화재뿐 아니라 전승유물,생활문화유산,매장문화유산을 포함한 포괄적인 의미가 국민적 인식위에 존재해야만이 문화유산의 의미를 되새기고 보존에 일조를 할수 있으리라 본다.
2.세계속의 우리 문화유산의 위치
요즘 우리 문화유산이 가장 아름답고 우수하다는 것이 마치 단전호흡이라도 하듯이 동안을 크게 하고 미적인 내음을 맡으려는 행태가 유행처럼 번져 나간다.그러나 여기의 소제목처럼 세계속의 우리 문화유산의 위치는 중국변방의 한 소국에서 만들어진 공예품의 수준을 벗어 나지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일견 세계적인 소더비나 크리스티의 경매에서 우리 문화유산이 얼마전만 해도 경매가가 상한가를 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가 다른 문화유산보다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IMF의 외환위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의 경매 참가가 줄어 급락한 사실은 그 동안의 자족한 문화우월주의의 거품이 빠진 예로 볼수 있다.
겸손하고 겸허한 입장에서 냉철히 비판하고 받는 문화적 태도는 세계속의 문화가치를 높일수 있는 첩경이 되는 셈이다.문화란 것은 항상 단순한 것에서 출발하여 고급한 문화로 나아가고 절정에 이르렀다가 저속한 문화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 바로 문화의 속성이다. 이런점에서는 문화우월주의란 것은 문화의 속성을 제대로n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온 결과이다.인디언 문화는 미국에서는 대형박물관에서 그 진열관이 따로 마련된 곳이 많다.중국관이나 한국,일본관을 합해도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박물관측은 문화의 우수성에 따른 진열을 하였는가,아니면 자료의 채집 용이성 때문에 진열관의 크기가 결정이 되었나... 유럽에는 아프리카 유물의 진열관이 비교적 큰편이다...중국의 문화유산역시 우수성을 지닌 것이 있는 반면 조악한면을 지닌 것도 다수 있고 이집트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화란 것은 그 민족의 보편적인 사회상과 특수한 문화적 입장을 보여주는 가늠자가 됨에 진열의 크기와 대랴의 유물,기능적인 기교성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특수한 사회 문화적인 내용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세계속의 문화유산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한국문화 유산의 존재는 그 특수성에서 만큼은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한국은 중국의 동북에 있는 국가이므로 중국의 영행을 많이 받아왔다.중국의 왕조 흥망성쇠가 우리나라와 운명을 같이 해 온곳은 우연이 아닌 역사적 산물이라 볼수 있다.
그러면 보편적인 불교문화가 우리나라로 전해지면서 특수한 문화의 변화를 알아보도록 하자.인도에서는 불타의 출현 이후에 감히 누구도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그러나 제자들의 결집을 통해 그 불교문화가 융성한 발전을 이루었는데,,석가모니 열반이후(기원전 566~486) 아쇼카왕시대(기원전 269~23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교문화유적이 출현하게 된다.이것은 불교미술사의 서장을 장식한 아쇼카왕의 기념주이다,현존하는 것은 모두 14개로 소,코끼리,사자등을 새긴 전륜성왕의 의미이다...이러한 아쇼카왕의 석주건립은 갑작스런 아쇼카왕의 예술성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있은 알렋산더 원정으로 피난온 페르샤인의 영향을 심대히 받은 것이라 할수 있다.이후 불상출현은 기원후 1세기에 이르러서이다,따라서 인도는 특수한 인도적인 신관에서 보편적인 문화로 발돋음 한 것은 불상의 출현이후이다.
불상의 시원은 간다라와 마투라에서이다.각각 독자적으로 발전을 하다 2세기에 이르러 이들은 서로 영행을 받고 종국에는 굽타미술이라는 한획을 그었던 것이다.굽타제국은 인도 역사성 전무후무한 일로서 문화적 황금기일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시대였었다. 이민족의 지배하에 놓였던 인도는 순인도적인 문화의 자신감으로 그 문화의 절정기를 누렸다.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면 난숙기의 퇴폐적인 요소가 불상에 표현된다. . 이상 인도의 불상의 발전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문화의 발전은 특수성→보편성→특수성으로 변화,발전,도태하게 된 사실을 알수 있다.따라서 인도의 문화란 것은 조악한것에서부터 절정기의 작품 그리고 퇴폐적인 모든 시대의 것을 총괄한다.여기에서 문화의 발전을 배우고 그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란 것은 그 우위는 있을수 없으며 어떠한 문화도 특수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이 있는 가하면 창안기의 서투른 작품도 있을 수 있다란 것으로 문화란 것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했다.
1960년 뚝섬에서 5센티,7G의 자그마한 불상을 발견했다.전진국에서 고구려에 보낸 불상과 경전과 승려에게서 전해 질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한마디로 초기에 전래된 불상일수도 있다.이것은 경남의령에서 몇 년후 발견된 연가 7년명 고구려 불상의 祖形일수도 있기에 학계의 관심이 대단했다한다.6세기초경의 연가7년명불이 어느덧 군수리불상의 의엿한 모습을 가지더니 급기야는 국보83호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탄생시키게 된다.이 미륵불의 탄생은 특수성의 문화적 수입국에서 문화의 보편성을 수출할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준다.미륵분가사유상은 5세기말에 북위작이 다수 있으나 이처럼 유려함을 보이고 풀ㄴ빛을 띠는 동이 전달하는 체온은 문화의 생명력을 보여 준다. 이러한 생명력은 다시 우리나라에 편재한 화강암의 석질을 이용한 마애불이란 석굴에서 변형된 형태로 표현되어 민간의 신앙으로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문화의 생명력에 대해서 부연한다면 초기 철기시대에는 가야를 통해 일본에 문화를 전달하고 가야의 멸망기에는 도일한 가야인들에 의해 須惠器라는 가야토기가 일본에 출현하게 된다.가야는 멸망했지만 가야인은 살아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또한 백제를 통해 전달된 문화는 도일한 백제인을 통해 일본에 법륭사나 목조조각 및 공예를 통해 남아있다. 그러한 목조조각이나 공예는 또다른 문화를 낳았고 일본 문화의 조형으로서 그 가치는 심대하였다.신라의 통일정권이 성립된후 일본은 도일한 백제인의 영향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하였지만 모든 문화부문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임진란을 통해 일본에는 토기단계에서 자기의 생산으로 놀라운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고 道學이라는 유교 사상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위에서 우리는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알아 보았다.문화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항상 움직이며 변화한다.한정체된 문화는 생명력을 잃어버려 문화사적인 가치를 잃어버려 특수성만을 간직한 지엽적인 부분으로 잔존하게 된다.
독자중의 일부는 이집트의 피라밋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리라 믿는다.본인 역시 기자의 피라밋을 보고 그 충격의 여파를 며칠간 실감하였다.규모에서나 능력에서나 기술면이나 연대라는 측면에서나 어느것 하나도 비교를 할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피라밋의 초기 형태를 본다면 무기단식 적석총에서 계단식 피라밋으로 그리고 마침내 삼각피라밋의 탄생을 보게 된다.즉 탄생에는 일정한 단계를 거쳤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는 나일강을 따라 생활터전을 삼았다.그것은 나일강이 제공하는 기름진 경작지때문이었다.일년에 8~9개월간은 경작지를 일구고 7월과 11월 사이에 있는 홍수기에는 유휴 인력이 남게 된다.주로 이 시기에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루어 졌다고 본다,나일강의 범람이 남기고 간 것은 풍부한 양질의 토사가 쌓여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경제적인 부와 더불어 나일강을 중심으로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심의 탄생이다.피라밋의 존재는 모두 나일강의 서안에 있다.태양은 동에서 뜨서 서로 지기에 저 세상에서 밤마다의 여행을 시작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점은 피라밋은 140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크기에 비해 그 유물은 빈약하고 현실의 구조가 단순하다는 것이다. 즉 죽은자는 그 생명이 영원히 존속되도록 유체를 보존코자 했으며 태양신 라와 연결코자 했던 것이다.
피라밋이 대단한 건축적 기술이나 과학적 설계에서 비롯 하였지만 죽은자의 무덤인 음택에서 벗어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고왕국이 끝난후 이들은 테베(룩소르)에서 도굴을 방지키 위해 수십미터 땅속으로 유체를 감추었기 때문이다.더불어 태양신 라를 섬기는 신앙은 더욱더 체계화 되었다.따라서 문화적 특수성과 보편성의 존재는 강인한 정신력이 바탕이 되어 생명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설명이 지나치게 길어 졌는지 모르겠으나 그 요점은 세계문화속의 창의적 생명력의 흐름을 보아야 만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수 있다는 것이다.
3.해외 유출문화유산의 문제점
전에 대영박물관에 근무하는 CURATER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왜 한국인들은 외국의 박물관에 가면 자기것이 왜 거기에 있는 지 의심을 하느냐?라고 ... 이글은 모 잡지에 실린 글이지만 우리는 우리 문화가 불법으로 유출된 데 피해의식을 자지고 있는 것같다. 더듬어 보면 황룡사 9층목탑이 화재로 불탄것이나 임진란때 그 많은 문화유산의 약탈,방화일제기에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유산등이 그 출처도 모른채 진열대에 오른 것이 허다하다.
60년대초 한일문화재 반환협정을 살펴보면 반환문화유산은 1321점이라고 하는데 이중 圖書가 대다수인데 문집류중 18,9세기의 것이 거의 전부였다 한다.당시 일본국 대표는 “민간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도 인도하도록 권고하겠다”라고 말한바 있다.반환협정의 일본측 공식용어는 반환이 아니라 인도였다.강탈의 인정이 아니라 시혜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일들은 문민정부에서도 발생한바 있는데,그것이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려진 외규장각 도서 반환사건이다.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강화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도서 300여권을 경부고속전철을 프랑스가 입찰을 따면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비치므로 신문지상에서 연일 야단법석을 친 것을 말한다.이것은 미테랑 대통령이 의례적으로 준 한권의 책으로 마무리 되고 그 고속전철 때문에 경주에 전철이 들어가 한반도의 고대문화유산이 쑥대밭으로 될뻔한 사건이다.
위와 같은 일들을 볼 때 문화란 것이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는 경제에 부속된 종속된 것으로 인식을 한다는 데 있다.급작스런 고속전철 공사로 인해 구제발굴에 정신이 없을 때 프랑스 미테랑대통령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반대를 무릅쓰고 루불박물관의 현대화에 정열을 쏟았다.문화란 것이 일회성 선심으로 끝난다고 본다면 아직도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찾기는 요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이러한 해외유출문화유산은 어떻게 취급을 해야만 하는가. 현재 진열되고 있는 유물이라도 그 유통경로를 알아 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그렇다면 세계유수박물관에 진열되는 유물은 그 자체로서 만족을 해야만 한다.그러나 일제때 유출된 개인소장품등 일괄유물은 정부에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개인의 소장품으로 끝나지 말고 대중앞에 선을 보이도록 권고를 해야만 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매장문화유산은 그 보존이 전승유물보다는 어려우므로 기증이나 보관의 형태로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나 민간단체 개인이 유출문화유산에 해야 할 일은 감추어진 우리 문화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요즘 진품명품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것을 국내에 한정시키지 말고 해외 문화유산의 실태를 밝히는 데 이용이 된다면 방송의 공익성에도 크게 기여할것이다.이 프로그램의 문화유산을 재화취급에는 반대를 하지만 긍정적인 면을 부인할 수는 없다.그러나 도굴과 불법유통이 근절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수요자를 위한 도난이 극성을 부릴것이 뻔하다.진품명품이 해외 문화유산의 실태 파악에 이용이 된다면 우리 역사의 MISSING LINK(역사서의 소실로 확인할수 없는 사실)에 해답을 주리라 믿는다.
4.문화재 보호법
얼마전 민속마을 외암리 살리기 운동(천리안 포럼)을 했는데 원인은 느닷없이 전통건조물 보존법(문화재 관리법의 일부)으로 보존되는 민속마을에 군부대가 들어 선다는 것이었다.발단중 하나는 아산시의 외암리에 군부대설치의 질의서 답으로 문화재 위원회가 보낸 의견서의 내용이 불명확하다는 데 있었다.이러한 조건만 충족되면 허가를 해 줄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통건조물 보존법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건조물의 멸실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1989년에 개정한법이다.보존대상을 확대하여 집단적으로 보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 표명이다.만약에 군부대의 진입을 허가하여 원형을 훼손,멸실하였을때는 3조에 의해 그 허가를 해제한다면 과정에 대한 법의 의지는 상실되고 마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 발생시에 반드시 개입해야 할것이 문화관련 민간다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문화단체가 관변단체화하여 정부의 시책과 방임에 더부살이 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제대로 된 자생적인 문화단체(문화의 중요성)에 의한 권고와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군이나 구의 문화계에서는 그동안 관리,지도를 지양하고 관계 문화단체의 지원의 자율적인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 문화유산보존과 관리에 중점을 두야 하고 PC통신에 각군과 구의 열린마당을 마련하여 문화유산 관리에 전국적인 NETWORK를 구축해야 하며 이를 실천적으로 운영해야한다.저변에는 관리의 포기와 민간단체와 지역민들에 지원과 자율성부여라는 것이 바로 문화의 생활화 운동이다.
차제에 문화재보호법의 일방적인 아집을 버려야 한다.문화재 보호법3장 44조에 의하면 공사중 발굴시는 발굴에 소요되는 경비를 시공자가 부담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그동안 공사의 중지는 물론 발굴에 소용되는 경비를 부담한다면 그 손실은 엄청나다.지정문화재인 경우 역시 재산권의 행사가 중지된다.결과로는 유물발견시에 신고는 급격히 줄게 되고 발견해도 감춰 버리는 명목상의 문화재 보호법과 전혀 반대의 문화재 파괴법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비합리적인 법구문은 과감히 고치고 정부의 문화유산 보호에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는한 우리의 문화유산 보전에는 그 영속성이 보장되기는 어렵다.건조물의 보수,유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 보수의 표준화 및 보수의 완벽성에도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강회를 칠해야 할곳을 시멘트를 바르고 대패질로 세운 기둥에다 기계로 깍은 기둥을 세운다면 보수가 아니라 훼손이 될 것은 뻔한 이치인데 이러한 것을 문화재 보호라는 미명 아래 이뤄지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훼손 및 멸실을 가져오는 면죄부로서의 역할만을 문화재 보호법은 담당할것이다.프랑스 파리 시내에 있는 그럴듯한 석회암으로 만든 작품은 거의가 복제품이다.그러나 부단히 노력한 결과 표준화와 보수의 적절성으로 아름다운 파리의 거리를 문화도시의 거리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있지 않는가. 적어도 문화유산의 해에 이러한 법제의 개정과 문화보전에 대한 효율적인 시책이 나오지 않은것에 대해서는 실로 유감이다. 5.문화유산 보전을 위한 방법과 우리의 할 일
현재와 같이 과거도 전란의 소용돌이와 변화속에 몸부림을 쳐왔다.그속에서 살아 남은 것들의 가치는 무한하다고 하겠다.남은것들이 사라진 것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표본조사처럼 타임캡슐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사라져 갔고 그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도전과 응전속에서 들풀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민족의 유산은 그것으로서 가치로운 것이 아닌가.그러나 그것이 한순간의 실수로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역사적 표본의 상실이다.
문화유산의 이해와 보존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견딜수 없는 외침에도 ‘살아남은 것들에 대한 경외감’이다.
살아남은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지키기 위해서는 몇가지의 실천적 과제가 필요하다. 그 첫째가 문화적 인식의 고양이다. 앞서말한바대로 문화는 종속적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을 해야한다.모든 국민이 우리 문화의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경제적 이익과는 별도의 민족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박물관에는 외국인들만이 가는 곳이 아니라 미술전공자들이 그림을 모사하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고궁이나 전시회에 감상할수 있는 문화적 인식의 고양이 필요하다.
둘째 학생들의 문화교육실천이다. 한때 전인교육이라는 말이 유행한적이 있다.무엇으로 전인교육을 시켜야 하는가.우리는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아직도 수학여행이 놀고 먹는 파행적 행사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학여행이 修學이라는 인식의 부족이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단위별 여행으로 바뀌어야 하고 이벤트식으로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획되어 지어야 바람직하다. 단체 수학여행 학생들이 전북 금산사뒤벽에 온갖 낙서를 늘어 놓았고 세계 최초 삼층 석탑인 감은사 탑에 자기 이름자를 써 넣는 것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모르는 데서 발로가 된 것이다.
셋째 기존 문화장소의 활용이다.(전통민속마을) 전통민속마을을 비롯한 시골의 대부분은 젊은이 공동화 현상을 빗고 있다.서원이나 향교는 관리의 소홀로 인해 황폐화 되어 가고 시골의 瓦家와 초가는 기울여져 가고 있다.앞으로 한세대면 사라져 박물관 뜰에서만 볼수 있는 우리의 정겨운 시골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민속마을내의 대부분은 안내서 조차 없다는 것은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이에 자율적이 관리를 위해 관리비를 징수해야 하고 이에 따른 안내서 및 친절등으로 봉사를 해야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마을에서는 전통 행사를 기획하고 서원과 향교는 예절교육과 서예,도학으로서 시민과 함께 살아 숨쉬는 그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변화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전통마을 보전은 그 보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넷째, 생활문화 전승이다. 우리의 생활속에 전통문화는 사라져 버렸다.다듬이 소리는 TV에서 전통 음료는 슈퍼에서 구입을 해야한다.가정을 해보자.집안의 장식을 전통문양으로 하고 문갑,창호지,,생활한복등으로 바꾸다면 전통이란 것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느껴 질것이다.커피 대신 전통차로 집안에 은은한 차향이 배기게 하는 것은 어떤가.
마지막으로 문화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다. 지금은 개발논리가 우선하는 시대이다.국민들이 문화를 보전하고 환경은 어떠한 것보다 앞선다는 시각이 없이는 위의 것을 실천한다고 해도 공염불에 불과하다.청계산이 놀이터로 개발이 되고 영월 동강의 수많은 세계적인 동굴이 물에 잠기고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가 물에 잠기는 것은 비단 개발자 뿐 아니라 방관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삼국시대의 성곽이 지천에 널려 있고 천오백기가 넘는 석탑이 산과들에 방치되어 있다.일천여개의 서원과 향교가 고을 곳곳에 있다.혹자는 조선시대의 건축을 보면 한심스럽다고 말할지도 모른다.그러나 2층과 3층을 올리지 않은 문화의 깊은 뜻을 알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절제와 겸손의 실천의 장 서원건축...그것은 어느새 나의 이상이 되어 버렸다. 높은 산중에 기단을 세우고 佛國을 만들고자 하는 신라인의 이상은 바로 신라 천년의 생명력이다.경제가 아무리 흥하더라도 정신이 황폐화 되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우리는 IMF의 교훈에서 절실히 느꼈다.지금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문화유산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바로 경외감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지금 우리 것을 제대로 보전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오천년을 잃어 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민족이 될지도 모른다.
아사달 차문성(SOCHAN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