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서화(古書畵)

추사 김정희선생유묵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8. 4. 20.

 

김정희 [, 1786~1856]
요약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본관 경주
완당·추사·예당·시암·과파·노과
별칭 자 원춘
활동분야 정치, 예술
출생지 충남 예산
주요저서 《실사구시설》《완당집》《금석과안록》 《완당척독》
주요작품 《묵죽도》《묵란도》
추사고택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충남기념물 제43호.
본문

본관 경주. 자 원춘(). 호 완당()·추사()·예당()·시암()·과파()·노과().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에 가서 당대의 거유() 완원(옹방강()·조강() 등과 교유, 경학(금석학()·서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석()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 저서에 《금석과안록()》 《완당척독()》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 《묵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