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문서(古文書)

송시열 한원진 윤봉구 권상하 등 12장간찰첩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9. 11. 30.

 

 

 

 

 권상하 [, 1641~1721]

 

조선 중기의 학자. 스승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청주에 세웠고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였다

본문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안동. 서울 출생. 자 치도(). 호 수암() ·한수재(). 시호 문순(). 1660년(현종 1) 19세로 진사()가 되었으나, 송시열() ·송준길()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1659년(효종 10)에 있었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덕원부()에 유배되고, 남인()들이 득세하자, 청풍()의 산중에서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는 한편, 정 ·주()의 서적을 교정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서 소환되어 정읍에서 사사()되자, 스승의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았고,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청주()에 세워 명나라 신종() ·의종()을 배향하고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 ·좌의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이()를 조종()으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였다.

그의 문인 한원진()과 이간()이 인물성편재문제()로 논쟁하자,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충주의 누암서원(), 청풍의 황강서원(), 정읍의 고암서원(), 성주()의 노강서원(), 보은의 산앙사(), 예산의 집성사(), 송화의 영당()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한수재집()》 《삼서집의()》 등이 있다.

 한원진

한원진 [, 1682~1751]
요약
조선 후기 학자. 이간() 등과 호락논쟁()을 일으켜, 호서지역 학자들의 학설인 호론()을 이끌었다. 문집으로《남당집》이 있으며, 50년 만에 《주자언론동이고()》를 완성하였다.
본관 청주()
남당()
별칭 자 덕소(), 시호 문순()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주자언론동이고()》(1741)

본관 청주(). 자 덕소(). 호 남당(). 시호 문순(). 송시열()의 학맥을 이은 서인 산림() 권상하()의 제자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가 경종 때에 노론()이 축출될 때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으로 출사하였으나 영조에게 소론을 배척하다가 삭직되었다. 그 후로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지만 응하지 않았으며,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같은 문인인 이간() 등과 호락논쟁()을 일으켜, 호서지역 학자들의 학설인 호론()을 이끌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인()이 오상()을 모두 갖추었음에 비해 초목 금수와 같은 물()에는 그것이 치우치게 존재하여, 인성과 물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는 이러한 주장은 사람과 금수의 근본적 차이를 강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집으로 《남당집》이 있으며, 송시열과 스승 권상하의 사업을 이어받아 50년 만에 《주자언론동이고()》(1741)를 완성하였다. 그 밖에 《역학답문()》 《의례경전통해보()》 등 주역 관계의 저술들과 《장자변해()》 등의 편저들이 있다.


양곡사 /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 양곡사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남당 한원진선생의 사당이다.

 




 -

 

 

 

윤봉구(尹鳳九)에 대하여
1681년(숙종 7)∼1767년(영조 4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호조참판 비경(飛卿)의 손자로, 명운(明運)의 아들이며, 우참찬 봉오(鳳五)의 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 1)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지평, 이듬해 장령이 되었고, 1739년 집의에 이르렀다.1741년 부호군이 되었는데 이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書筵官), 이듬해 찬선을 차례로 역임하고, 1760년 대사헌에 특제(特除)되었으며, 1763년 지돈령(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현상벽(玄尙璧)·채지홍(蔡之洪)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불리며, 인성(人性)·물성(物性)에 대한 이동(異同)을 논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들 중 이간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인성과 물성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한 것이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회적·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하였으며, 저술내용면에서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