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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화(古書畵)

춘암 이강 (春菴 李堈. 1877(고종 14)~1955)의 묵서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18. 10. 28.

  품   명 춘암 이강 (春菴 李堈. 1877(고종 14)~1955)18.10.소.구.10  18-11.대.한.4.매

주   기  의친왕 춘암 이강 (春菴 李堈. 1877(고종 14)~1955)의 묵서 오언시(五言詩)로 여백부 약간의 부분 얼룩, 부분 박락 외 글씨 부분은 온전하다.
<크기> 30.3×125.5cm

<참고>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고종 14)~1955)
한말의 왕족. 본관은 전주. 초명은 평길(平吉). 이름은 강(堈). 호는 만오(晩悟). 의왕(義王)·의화군(義和君)이라고도 한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장씨(貴人張氏)이다. 1891년(고종 28) 12월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金思濬)의 딸과 결혼했다. 1894년 9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에 갔다가 다음달에 귀국했다. 그는 1895년 특파대사에 임명되어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순방했다. 1900년에는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대학교 특별과에 입학했으며, 그해 8월에 의왕에 봉해졌다. 1905년 4월 미국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으며, 그해 6월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 1919년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과 모의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 김가진(金嘉鎭)·전협 등과 함께 33인 명의로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선언서를 준비했다. 그해 11월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安東)에 도착했으나 일본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송환되었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뒤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도일(渡日)을 강요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 살면서도 배일정신(排日精神)을 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