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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장 이야기한줄 수졸재 (守拙齋)

[스크랩] [한강을 걷다](24) 하담·김생사지·장미산성 [경향신문 2007-0-12]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7. 6. 4.

하담·김생사지·중원고구려비.장미산성 [경향신문 2007-0-12]



장미산성으로 오르다가 바라 본 남한강이다. 강의 왼쪽에 하담과 김생사지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창동마애불과 7층 석탑이 있다. 멀리 보이는 다리가 탄금대교이다.

강물을 따라 떠돌다가 충주에 다다르면 꼭 찾아보리라 다짐했던 곳이 있었다. 그곳은 연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는 하소(荷沼)가 있어서 하담(荷潭)이라고 불렸다는 곳이다. 남한강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든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는 이 마을을 굳이 찾아보리라 다짐했던 것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발길이 유난히 잦았기 때문이다. 다산은 그의 시 모음인 ‘귀전시초(歸田詩草)’와 ‘송파수작(松坡酬酢)’에 배를 타고 충주로 향하는 강행절구(江行絶句)들을 남겼으며 그의 문집인 ‘여유당전서’ 전체에 걸쳐 하담을 오가거나 하담을 생각하며 남긴 시와 글이 열편이 넘는다.


그런가 하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어우러지는 두물머리(二水頭) 근처의 소내(苕川)에 있던 다산의 집에는 큰형님인 정약현의 뜻을 좇아 망하루(望荷樓)라는 누대를 세우기도 했다. ‘망하’는 곧 하담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또 다산이 눈물을 삼키며 쓴 ‘망하루기’에 따르면 큰형님은 “날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즉시 그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슬퍼하고 근심하는 모양이 마치 무엇을 바라보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였고, 애처롭게 탄식하면서 어떤 때는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고 하니 소내에서 200리나 떨어졌다는 하담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선영이었다. 그의 조부모와 부모의 묘가 모두 그곳에 있었으니 형제들은 날마다 망하루에 올라 하담을 바라보며 슬픈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200리나 떨어졌으니 묘를 지키는 소나무의 끝이라도 보였을까. 다산이 지은 시인 ‘망하루를 읊은 백씨의 시에 받들어 화답하다(奉和伯氏望荷樓之作)’에 형제들의 절절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강 위 지은 누대 반 채뿐인데 / 하늘빛이 저 멀리 예주성을 가리키네 / 지으면서 흘린 눈물 발과 창에 배어 있고 / 부모 그린 그 정성은 꽃도 새도 다 안다오 / 도도(桃島)에 뜬 구름도 뜻이 있어 떴나보이 / 탄금대를 흐르는 물 슬퍼 소리 없다던가 / 서러워라 손수 심은 정원의 나무들은 / 봄이 오면 가지가지 잎이 다시 피련마는…”


다산은 문과에 급제했던 1789년, 서둘러 배를 타고 하담에 누워 계신 어머니 윤씨를 찾아 기쁜 소식을 전했으며, 1801년에는 장기(長기)로 유배를 가는 길에 하직 인사를 올리기 위해 하담을 찾았다. 다산은 그때의 애통한 심정을 ‘하담에서의 이별(荷潭別)’이라는 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데 너무도 슬프다. 금부의 관리들이 서둘러 떠나자며 핍박하는 와중에 머리를 조아리며 슬퍼하던 모습이 절절이 배어있는 그 시구들을 읽으며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내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여 아시나이까, 모르시나이까. / 어머님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 가문이 금방 다 무너지고 / 죽느냐 사느냐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 / 이 목숨 비록 부지한다 해도 / 큰 기대는 이미 틀렸습니다. / 이 아들 낳고 부모님 기뻐하시고 / 쉴 새 없이 만지시고 기르셨지요. / 하늘같은 그 은혜 꼭 갚으려 했더니 /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리도 못돼버려 / 이 세상 사람들 거의가 / 아들 낳은 것 축하 않게 만들 줄을”


그로부터 시작된 그의 유배생활은 장기에서 전남 강진으로 길게 이어져 해마다 꽃피는 봄이면 찾던 선영도 찾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산은 그것을 미리 예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1800년에는 자신의 선영과 이웃해 선영을 모신 모당(慕堂) 홍이상(1549~1615)의 후손인 홍성장(洪聖長)과 힘을 합해 헐벗은 선영 주위에 나무를 심고 가꾸기로 했으니 말이다. 선영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 돈은 자신들이 댈 것이니 우마와 아이들이 묘소를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게 막아주고 나무를 잘 가꾸어 달라고 협조를 구했다. 그 내용은 ‘하담금송첩서(荷潭禁松帖序)’에 남아 있으며 주민 모두 스스로 무덤을 가꾸고 지키는 수총호(守塚戶)가 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고 한다.



대동서법(大東書法)에 실린 김생의 글씨

하지만 세월이 흘렀는가. 하담이 있었던 가차산면은 지금의 충주시 금가면이 되었으며 ‘하담추월(荷潭秋月)’은 충주팔경의 하나로 꼽혔지만 다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산이 그토록 공을 들여 가꾸고 자주 찾았던 선영의 흔적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조차 만나기 어려웠다. 둘째 형인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의 묘는 1981년 10월30일 천진암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그는 천진암강학회(1779~1784)와 명례방집회(1784~1785)를 통해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장할 당시 이미 찾는 이 없는 파묘와 같았다고 하니 불과 170여년 만에 그리 된 것이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던 것들 중 사라진 것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열광하며 문화인 줄 알고 있으며 이제는 그것마저도 산업화에 따른 개발논리를 앞세워 가차없이 짓밟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금가면 일대는 공군기지가 들어서면서 한차례 마을의 모습이 바뀌었고 댐이 들어서면서 불어난 물 때문에 다시 삶터를 옮겨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남한강과 맞닿아 있는 경치 좋은 곳에는 골프장이 들어서거나 별장이 자리를 잡더니 이제는 큰 도로가 뚫리면서 또 한차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미 덩치 큰 것들은 사라져버리고 그나마 잔존하고 있는 미미한 옛 흔적들조차도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깡그리 사라지고 있었으니 하담과 잇대어 있는 유송리 반송마을의 김생사지(金生寺址)가 그것이다. 김생이 누구인가. 나라 안뿐 아니라 중국을 아울러서 버금가라면 서러울 명필이 아니던가. 그가 두타행(頭陀行)을 하며 머물렀다는 절인 김생사지에는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장대석과 같은 미미한 흔적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중장비가 절터를 휩쓸었고 탄금대교 옆으로 놓이는 교각을 향해 국도대체 우회도로의 큰 길이 이어질 모양이었다. 밭으로 경작되던 곳은 말끔히 정리되었고 드러난 돌은 무더기로 쌓아 놓았으니 이제 어찌 될지는 불을 보듯 빤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전 이곳에는 경을 외는 소리나 김생에게 글을 배우던 이들의 글 읽는 소리만이 낭랑하게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절 앞을 흘러가는 남한강의 물소리가 너무도 시끄러워 글을 읽는데 방해를 받자 김생이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루 밤 사이에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자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어 그때부터 벙어리여울이라고 했으며, 그때 쌓은 제방을 김생제방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절터에는 깨진 와편을 쌓아 놓은 무더기와 장대석 두엇 정도 남은 것이 고작이다. 그나마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세운 비석마저 없다면 이곳이 신필(神筆) 김생이 주석했던 절이라는 것을 알 길이 막연해 보였다.

 

강 곁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에돌아 조정지댐을 건너 고구려비로 향했다. 아차산성과 더불어 남한에 남아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고구려 유적이자 유일한 비석이다. 이미 지나온 단양의 적성산성에 신라가 적성비를 세운 것과 남한강변의 고구려비는 모두 영토 확장을 기념하여 세운 척경비(拓境碑)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더구나 가까이에는 신라에서 세운 7층석탑이 있으며 고구려비의 뒷산이라 할 수 있는 장미산의 산성은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백제의 흔적도 겹쳐 있으니 이 일대는 삼국의 문화가 모두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살갑게 모여 산 흔적이 아니라는 것이 유감이다.

 

처음에는 백제가 다음에는 고구려, 그리고 최후에는 신라가 이 땅을 차지했으며 그 투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7층석탑과 중원 고구려비가 아니던가. 또 근처에는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후 소경을 설치하고 귀족들과 함께 대가야의 유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흔적인 누암리 고분군이 있으니 달래강과 남한강의 물길이 만나는 이 지역이 중원의 중심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마모가 심하여 읽을 수는 없지만 그 생김만으로도 광개토대왕비를 떠올리게 하는 고구려비를 뒤로 하고 산으로 올랐다.



국보 205호, 중원 고구려비

비록 해거름이지만 산으로 올랐던 것은 장미산성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만 안계가 트이는 곳에 앉아 이 넓은 강과 땅을 내다보며 호흡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굳이 햇빛이 쨍한 대낮보다는 저물어 가는 놀빛에 물들어가는 시간을 택한 것 또한 쇠잔해져버린 역사를 되짚어 보기에 알맞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잔설이 희끗하게 남아 있는 산길을 걸어 다다른 곳, 강은 활짝 펼쳐져 도저하게 흐르고 뭇 산의 능선들은 유장하게 이어졌다. 충주시내며 탄금대와 7층석탑, 그리고 창동마애불과 김생사지를 비롯해 지금껏 지나온 곳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바람은 사정없이 불었고 온 몸은 꽁꽁 얼어 점점 붉은 빛으로 쇠하여 가는 한줄기 태양빛이 그리웠다. 곁에 있는 바위며 나무들이 벌겋게 물들어 가는 곳을 찾아 나도 그들처럼 바람에 흔들리기만 할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붉은 기운에 몸을 맡겨놓았을 뿐 손에 쥐고 있던 생각은 놓고 말았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역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저무는 해가 빚어 놓은 하늘은 지금껏 내가 본 하늘 중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황홀했으며 사위에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찬란하기만 했다. 나의 기억이 소급되지 못하는 어느 한 때, 남한강을 따라 펼쳐진 이곳 또한 저토록 찬란했으리라.  
 
다산의 詩중 예주성은 충주 
 

 
김생사지

다산이 지은 시 중에 예주성(예州城)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곧 충주를 말하는 것이다. 또 그가 지은 다른 시 중에 하담 근처 남한강의 지명들이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흥미롭다. ‘하담을 떠나며(離荷潭)’라는 시에 “사휴정(四休亭) 아래 물줄기 넘실넘실 흐르는데 / 객중의 말 슬피 울며 나룻배에 올랐네 / 가흥역(嘉興驛)에 당도하여 강어귀서 바라보니 / 장미산(薔薇山) 푸른빛이 동녘 하늘 아련하네”라고 했는데 사휴정이란 홍이상을 추모하여 하담에 세운 모현정(慕賢亭)을 일컫는 것이지 싶다. 모현정이 있는 곳이 강가에 우뚝 솟은 사휴봉이기 때문이다. 또 도도(桃島)는 하담 서쪽에 있었다는데 그 존재를 알 길이 없었다.

 

김생사지는 충북도 기념물 114호이며 남한강가에 잇대어 있다. 더러 옛 사람들의 시문에 그 존재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선후기의 역사가인 수산(修山) 이종휘(1731∼1797)가 쓴 ‘김생사중수기’가 그의 문집인 ‘수산집’에 전한다. 김생제방이라고 불렸던 제방은 충주댐으로 인해 불어난 물로 수몰되고 말았으며 지금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세운 비석만이 절터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중원 고구려비는 1979년 4월에 발굴되었으며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2m 남짓하며 사각기둥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각형의 네면 중 세면에서는 글씨를 발견할 수 있지만 뒷면에도 글자를 새겼는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려 있다. 건립연대는 판독의 까다로움 때문에 5세기 전반 광개토왕대부터 6세기 중·후반 평원왕대(559~590)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 중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하여 449년(장수왕 37)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비문에 보이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은 비석의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으로 당시 양국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알 수 있으며 고구려에서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불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장미산성은 고구려비 옆의 등산로를 따라 1시간30분 남짓으로 가볍게 오를 수 있으며 오르는 길에 바라보는 남한강은 장관이다.

출처 : 새로운 삶 인생 사랑 (새삶나눔터) 원문보기 글쓴이 : 投身爲國
출처 : 충주전통문화회
글쓴이 : 동수마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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