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국구(國舅·왕의 장인)는 조선시대 권력의 상징이었다. 각종 사극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국구는 딸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외척(外戚)’의 핵심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인원왕후의 기록에 등장하는 국구 김주신과 부인 조 씨의 궁중생활은 살얼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로 발굴된 숙종의 세 번째 정비 인원왕후 김씨의 ‘션군유사’(선군유사·先君遺事·부친에 관한 회상)와 ‘션비유사’(선비유사·先비遺事·모친에 관한 회상)를 보면 왕후의 친정 부모인 김주신 부부가 궁중에서 어떻게 마음을 졸이고 살았는가와 당시의 궁중 생활상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평생을 근신했던 왕비의 부모=오랫동안 궁중을 출입해 온 부친 김주신이 거의 매일 보는 나인의 얼굴을 몰라보자 인원왕후가 묻는다. “몇 해를 거의 날마다 보는 사람을 능히 알지 못하니 무슨 까닭이십니까.” 그러자 김주신이 답한다. “신(臣)이 비록 딸을 받들어 궁중에 출입하오나 어찌 감히 눈을 들어 둘러보오리까. 또한 마음이 황송한고로 눈 가운데 스스로 보이는 바가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궁중에 들어서면 나막신의 목화 부리만 쳐다보고 길을 걷다 보니 나인의 얼굴조차 모른다는 것이었다. ‘션비유사’에 따르면 왕후의 모친 조씨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 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시고, …궁인이 이르되 ‘여편네는 별로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나이다’ 하면 ‘여편네는 나라의 신하가 아니냐’고 대답하셨다.” 특히 조씨 부인은 궁중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과 들리는 말에 대해 ‘소경’과 ‘귀머거리’로 살았다. “더욱이 언어에 조심하셔서 바깥말씀을 일찍이 내게 전하시지 아니하시고, 안말씀을 들으셔도 듣지 않음같이 하시고, 여상궁배(상궁)로 더불어 비밀스러운 말들이 오고갈 것 같으면 즉시 문 밖에 나가 기다리시고….” 딸이 주는 하사품에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척촌만 한 비단 조각을 주려고 해도 반드시 강권한 후에야 받으시나 항상 떳떳지 못하게 놀라듯이 하시고 궁중에 내려오는 관례라고 해도 간절히 사양하시며 ‘과복한 재앙을 이루게 하지 마소서’라고 말씀하셨다.” 딸을 신하의 예로만 대하는 부모에 대해 인원왕후는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멂이 민망하여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션군유사) 인원왕후는 부모에 대한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친정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하영 이화여대 교수는 “당시 왕의 처가 세력이 얼마나 근신하도록 교육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녹록지 않았던 인원왕후의 독서=세 번째 문집은 제목이 없고 ‘륙아뉵장’을 비롯해 세 작품이 수록돼 있다. 전체 분량이 950자인 이 문집은 크기(가로 7cm, 세로 12cm)가 요즘 담뱃갑보다 조금 커 휴대용으로 만든 소형 문학선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앞에 실린 ‘륙아뉵장’은 ‘시경(詩經)’의 ‘소아(小雅)·곡풍지십(谷風之什)·육아(蓼莪)’의 내용을 한글로 옮겨 쓰고 뜻을 풀이했다. 이 중 특별히 관심을 끄는 작품은 ‘노옹자탄직금도(老翁自歎織錦圖)’란 작품. 노년에 이른 삶을 탄식하는 내용의 한시인데, 아직까지 원전이 발견되지 않아 인원왕후가 노년기에 직접 썼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 교수는 “세 작품은 모두 자녀로서의 효성과 아내로서의 덕성, 인생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높은 차원의 글”이라며 “왕후의 독서량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세 문집의 저술 시기와 관련해 인원왕후가 ‘션군유사’를 쓰며 “노년에 이르러 오랜 병환으로 정신이 혼란한 때 이 글을 쓴다”고 밝힌 점을 들어 왕후가 70세로 세상을 떠난 1757년(영조 33년) 무렵으로 추정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인원왕후는 인현왕후 뒤이은 숙종 세번째 왕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1687∼1757)의 본관은 경주다.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2남 3녀 중 둘째 딸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다음 해(숙종 28년) 10월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됐다. 인경(仁敬), 인현(仁顯) 왕후에 이은 숙종의 세 번째 정비다. 실제로는 희빈 장씨에 이은 네 번째 비였으나 폐위된 장씨는 왕실기록에서 희빈으로 강등됐기 때문이다. 인원왕후는 궁중에 들어간 지 10년째인 숙종 37년 12월에 천연두를 앓은 것을 시작으로 홍진, 치통, 안질, 종기 등을 앓았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숙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식이 없었던 인원왕후는 영조를 친아들처럼 아끼며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원왕후는 숙종, 경종, 영조 3대에 걸쳐 55년 동안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로 있으면서 왕실과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왕후의 능은 명릉(明陵)으로 경기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묘역 내에 있다.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션군유사’에 따르면 “부친께서는 궁궐에 출입할 때마다 항상 조심하고 근신하여 다만 몸을 굽혀 목화부리(나막신 앞의 뾰족한 부분)만 보시고 눈을 굴려 곁으로 보시는 일이 없었다”고 묘사되는 등 당시 궁중 법도의 엄격함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정 교수는 “인원왕후의 문집에는 궁중 출입을 하던 왕비 부모의 행적과 왕비와 나눈 대화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당시 궁중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다”며 “그뿐만 아니라 순수 한글 기록인 만큼 18세기 국어 연구 및 궁중 언어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자료의 검토 작업에 참여했던 유림단체 박약회의 서수용 사무총장은 “글 내용이 인원왕후의 생애와 부합하고 ‘내가 어렸을 때’ 등 1인칭의 회상조의 문장이라는 점, 생부 김주신의 행적이 조선왕조실록의 ‘국구김주신졸기(國舅金柱臣卒記)’와 일치하는 점 등을 볼 때 왕후 자신이 직접 서술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인원왕후 문집에 대한 연구논문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소가 이달 말 발간하는 ‘한국문화연구’ 제12호를 통해 학계에 발표할 예정이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인원왕후 김씨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1687∼1757)의 본관은 경주다.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2남 3녀 중 둘째 딸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다음 해(숙종 28년) 10월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됐다. 인경(仁敬), 인현(仁顯) 왕후에 이은 숙종의 세 번째 정비다. 실제로는 희빈 장씨에 이은 네 번째 비였으나 폐위된 장씨는 왕실기록에서 희빈으로 강등됐기 때문이다.
인원왕후는 궁중에 들어간 지 10년째인 숙종 37년 12월에 천연두를 앓은 것을 시작으로 홍진, 치통, 안질, 종기 등을 앓았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숙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식이 없었던 인원왕후는 영조를 친아들처럼 아끼며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원왕후는 숙종, 경종, 영조 3대에 걸쳐 55년 동안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로 있으면서 왕실과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왕후의 능은 명릉(明陵)으로 경기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묘역 내에 있다.
위족보는 경주김씨족보로서 인원왕후의 아버지 이신 김주신(金柱臣)甲戌(1694) 선생의 서문이있다
크 기 22.8*36.5쎈치4책
주 기
김주신(金柱臣)에 대하여 | |
1661(현종 2)∼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남중(南重), 아버지는 생원 일진(一振)이다. 숙종의 장인이며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다.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 1699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 이어 사헌부감찰·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서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720년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이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임했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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