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棄菴集 내용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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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 3428-38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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棄庵集序 (序1) |
1819. 李晩秀가 지은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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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五言絶句: 咀風碧瀾, 松京途中, 過滿月臺, 月, 扶蘇寺, 水確, 贈勉學者, 善竹橋, 乙丑仲夏往西湖居士之家留話一宵江明月圓令人易感追念乙卯間道菴文會之樂欻已十餘年事而美叔氏奄作古人唯余與居士相對於此江之夜則安得無少一之感也遂成一絶以寓愴悼之懷居士姓韓名裕章字寊夫美叔名休氏許美叔其字自號春菴有學有行不幸早閼墓在長湍云, 科後監刈呂庄自嘲, 次伯兒, 己卯除夕前二日讀書有感, 尹兄稚繩留約不來, 松野謾成(二首), 赴家弟鐵山任所安州途中感吟, 盆梅, 與松汀主人同舟作樊川之行左琴右棋興致悠然仍賦一絶, 松汀夜話偶占求和, 送尹令肅恩之行付我以琴歸成二絶, 夢見亡室不勝傷念(二首), 自嘲, 自解, 戱題木枕, 送林弟商用赴庭試, 偶題, 往哭許煙客, 曉坐梳頭, 戱題疊韻二書字, 見階菊爲禾積所掩率吟寓感, 戊戌元晨戱題, 代姪兒邁和芝山同學諸少年因市僧寄示韻, 風蕉, 病臥亂藝, 往會南叔於茂村抑弟所爲說小酌戱成五絶, 落花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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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言絶句: 偶吟, 聞夜雷, 自警, 螢, 病後感吟, 贈勉學徒, 次李鼎和贈舅氏韻(二首), 敬菴初朞後贈同門子, 酬孟博, 除夕贈友人, 庚申日, 次島翁金丈贈勉李晦甫李景活韻, 科後次三一韻贈勉孟博, 代次家親命韻, 閒中偶占, 戊辰立春, 題任六叔聖與氏眞忘窩記後, 謾詠(二首), 偶吟, 戱成, 用三愁字擬奉金丈, 戱呈金丈, 自嘲, 次唐詩除夕, 次贈恩月亭主人原韻乃退陶詩而有一江明月亦君恩之語亭之名盖取於此而主人亦有所次二首余敢忘掘而疊成五絶, 春興, 綡軍亭, 送尹令肅恩之行付我以琴, 秋日卽事, 卽事, 馬死, 尹兄稚繩氏次示以明齋先生讀書忘字韻, 宜夏亭, 與尹仲任光衡竝騎牛伴行路上戱占別是一格未知於古有此否也, 吳士安命宅輓, 次魯汝草蟲韻, 又次示勉, 送尹兄稚繩赴楚山府, 答李元孝書仍以一絶謝其還琴, 酬雙棄軒李査翁(二首), 步還林弟商用病裏示韻五疊, 擬輓李副率景活, 偶題, 戱題二七絶奉寄南從叔鵩舍, 三疊當字, 偶題, 次南叔次吳伯降韻(三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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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言律詩: 寄奉龍頭新寓(四首), 次仲任餞歲韻, 除夕, 陪家親往海美水院洞聸拜藥泉相公影堂, 宿石門夢見堂叔有感(二首), 五龍洞大母氏回甲宴, 次孟博, 角里趙飛卿震彬甫以四韻古詩贈別尹稚繩光紹李浩然養源兩友浩然追和四疊二以答飛卿二以贈稚繩稚繩亦再疊一以自勉一以警兩人情性之發足以驗所存之美角里則雖以所居之左未得一接聲光而每因尹李兩友已得其進學之工今又得其詩而讀之尤信其可畏也浩然要余和之其意不可孤忘其僭拙疊成四篇以效木瓜之報(四首), 上京夕渡白馬江, 壬戌七月旣望與客同登遂安門樓, 科後次贈許戚丈汝正佖, 見茅屋爲風雨所破戱成, 奉贈韓寊夫二疊來和(二首), 替次聽流堂韻, 贈別尹兄稚繩行遣, 追步判書宗丈花樹會韻, 謹酬玄溪分韻示南伯敎冑寬(二首), 淸潭十律, 寄奉眞忘窩, 庚午首夏同柳原明諸益行至道峰叔平宅游賞溪山數日將向溫陵齋所臨發共次簡齋集韻, 溫陵夜話呼韻各賦, 復疊前韻贈任六叔求和, 亡室忌日宿鳥嶺不勝愴懷率成一律, 病中感秋, 甲寺歸路, 次贈月谷金丈, 金丈乞粟於陳村不利而還再疊前韻以寓傷歎之意, 謹酬月谷金丈(三首), 伯兒自山堂歸示其諸少年所與酬唱者次以勉之, 酬任從叔聖與氏瑗眞忘窩題詠韻, 酬檢田使嚴幼文璹, 許煙客來宿復次前韻相與唱酬而別, 又賦前韻贈李從叔士凝氏求和, 柳子强應運做成石壇求序甚恨旣序而又足以四律歸之, 夢見亡室不勝傷念仍成一律, 晴宵對月秋懷易感賦示林弟(二首), 重陽登後鬱歸賦, 謾興, 有感, 拙弟娶婦率歸不勝愴喜吟示一律, 玩棋, 聞堂弟擇得掃親臨庭試率成識喜, 戊子三月, 酬吳士安命宅, 佛甲寺, 夢陶友感吟, 會李晦甫於新院寺晦甫將赴擧戱步其軸中韻以贈, 泰仁披香堂題以湖南第一亭歷路登臨, 還家, 甲姪冠日感喜交中疊成二律以寓祝望之意(二首), 次韻吳老, 避癘鳳谷適値晬日伯兒携衣酒而來次示其韻, 次贈吳伯降, 竝酬吳士安父子見贈, 擬贐井邑新使君, 辛卯元日口占一律寄松翁求和, 再疊, 三疊, 四疊答李仲壽, 五疊擬贈李甥潤彬新恩之行, 新院寺, 寓悔, 回甲日酬外弟林商用濟遠見贈韻, 次吳伯降彦輔見寄韻(二首), 棄菴說答吳伯降(二首), 再疊(二首), 三疊(二首), 四疊(二首), 輓李伯謙濟民, 送尹兄稚繩赴楚山府(三首), 又酬林弟商用贈別韻追呈楚山使君, 酬商用寄示登高望野韻(二首), 酬商用草蟲韻(二首), 見鄕試榜寄賀鄭景儒來崇, 又屬鄭少年三初試要和, 復用前韻擬示景儒, 送朴士殷兄弟歸原峽, 次林弟商用苦雨韻, 次商用觀漲, 甲午仲秋與少年同作新院之游歸成二律示林弟商用(三首), 昨年重陽陰雨連仍殊失賞菊之趣後數日余以小酒往會李仲壽于省谷新寓仲壽爲示其九日所詠五律二篇而深恨當日因雨敗興之由余仍袖歸而冗薄未和若一債負焉今年重九宿雨新收日氣和暢可悅始酬其韻以俟異日逢場誦而道之(二首), 尹道明拾橡前鬱還宿于余朝飮菊邊復忙作橡行仍留五律要免蝟毛之罰余乃追酬而末寄戱意以俟逢場一笑焉(三首), 次外弟林商用以正言承召歷示(三首), 又次示韻(三首), 甲午除夕(二首), 乙未元朝(六首), 尹兄稚繩以承宣赴召旋擢兵參不勝喜賀率成二律(二首), 丙申元日, 上元往哭亡小婦新阡不勝悼念, 次商用韻寄示士殷東歸, 歸女之日斥牛經需又次前韻戱題排悶, 又酬士殷路次追寄(二首), 輓朴進士士殷(二首), 寄謝素台, 病餘感吟, 病臥亂囈(二首), 悼亡從士良, 輓尹甥綏基, 代侄兒邁和芝山同學諸少年因市僧寄示韻, 輓尹進士道明晟, 演鴉體, 戱贈南叔舞童艾湯之會(六首), 復占書字奉寄求和, 奉寄南承宣山寺之游, 再疊示兒, 三疊又寄南從叔, 四疊自道, 次吳伯降贈南叔韻仍呈南叔, 次隱候試奉別南承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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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言律詩: 輓堂叔解雷堂, 讀書, 自警, 石門菴, 次遂而留別韻, 文會雲藏寺寄石門菴諸益, 次李鼎和贈舅氏韻, 次龍頭主人壁上韻, 客保寧, 在石門敬酬三一軒(二首), 客洛得親書, 甲子除夕, 奉贈李戚丈湙求和, 替次聽流堂韻(三首), 輓李兵使義翼, 奉呈月谷金丈求和, 訪金丈復疊前韻, 聞仲弟得除宣傳喜次前韻, 同李浩然宿先師舊宅吟贈一律, 走乞居州愧悔自嘲, 奉呈林姑夫, 酬月谷金丈, 奉次南從祖八十歲軸中韻, 次亞使李從叔士凝氏韻贈尹稚繩, 余自銅山留別家弟行過浿郵李戚叔士鉉時在其伯氏任所關外逢迎其喜可知臨別士鉉爲贐一律仍與伯氏送我登練光亭同舟渡浿而別回望長林不覺黯然乃追步其韻以寓悵羡之意, 酬李鳳祐嗚瑞落成韻, 重陽登後鬱, 復用前韻, 次權生傳示韻二首末寓自勗之意, 追吟法聖津, 輓吳士安命宅, 挹白歸路歷見任氏子案上軸追酬其韻輪示同游諸人要和同游者卽李士凝台鼎任孝彦希魯嚴幼文璹任太初希沆尹仲禮坊李士鉉台漢任子時希聖時辛卯九月上浣也, 再疊前韻示幼文, 三疊答幼文兼寓自訟, 入城數旬塞書湖信日企寂然不勝憂菀仍成一律以足游篇之末, 示任魯汝, 新寓佳谷尹仲任光衡有詩步答, 丙申元日, 辛丑元朝寄示素翁, 演鴉體, 奉和南從叔, 曉占奇字又謝昨朝和草且求斤敎, 又效進退格奉寄南承宣, 次吳伯降贈南叔韻仍呈南叔, 又次寓戱, 次吳伯降自歎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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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言古詩: 閒下吟, 兒生後不勝喜憂仍效古律十二韻, 輓敬菴先生, 與家弟及村秀文會雲菴走草五十二韻古詩贈戒, 臨罷草成歸歟吟, 與孟博共次李白古詩十四韻以二寸火繩立限故欠圓可笑, 又次浩然贈稚繩韻(二首), 送柳原明游楊州, 次李浩然養源咏易, 敬次退陶先生韻(四首), 寄奉朗州遷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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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堂叔解雷堂 (1) |
解雷堂에게 보낸 편지이다. 근래 痘瘡이 치성하는데, 이것은 時氣가 조화롭지 못해서 생기는 것임에도, 痘神이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해서 巫妖에 혹하는 일이 많은데, 사대부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탄하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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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許汝正-佖 (2) |
許佖에게 보낸 편지이다. 연일 비가 와서 울적한 기분을 감당하지 못함을 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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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許汝正 (3) |
許佖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그의 홀어머니가 오래된 열병으로 눈을 감고 하는 일없이 그에게 책을 읽게 하고 그것을 듣는데, 귀로 익숙하게 듣고 마음으로 깨치니 그것 역시 깨달음에 맛이 있다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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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壽延-求年 (4) |
鄭求年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공부에 진전이 없어 책을 싸들고 선방에 앉아서 朱子書을 암송하게 된 사연을 적고 있는데, 머리는 부족하고 根基는 서지 않았다고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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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戚丈-復慶 (5) |
金復慶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복경이 文字를 부탁했는데, 거절할 수 없으나 잘 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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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尹稚繩-光紹 (6) |
尹光紹에게 보낸 편지이다. 城市中에 있기는 하지만 외부 일과는 무관하게 지내다 우연히 윤광소가 文學이 뛰어나 玉堂에 特除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고 기뻐하며 그에게 당부하는 글을 적고 있다. 文學이란 단지 經史만 널리 통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進講이란 章句를 해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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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尹稚繩 (7) |
尹光紹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생각한 것들을 편집해서 글을 짓는데, 마판에 엎드린 천리마가 천리를 마음에 두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니, 자기가 노둔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힘을 다했다고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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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尹稚繩 (8) |
尹光紹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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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尹稚繩 (8) |
尹光紹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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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尹稚繩 (9) |
尹光紹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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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尹稚繩 (10) |
尹光紹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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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尹稚繩 (10) |
尹光紹에게 보낸 편지로 권유의 동생이 압록강 임지로 떠난 지 며칠 되었다고 하면서 동생을 걱정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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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尹稚繩 (11) |
尹光紹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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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尹稚繩 (11) |
尹光紹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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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尹稚繩 (12) |
尹光紹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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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尹稚繩 (12) |
尹光紹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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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尹稚繩 (14) |
尹光紹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俗吏들의 痼弊가 심하고 자신은 관직은 그만두고 싶다는 심경을 드러낸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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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一菴尹丈-東源 (17) |
尹東源에게 올린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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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浩然-養源 (17) |
李養源에게 보낸 편지이다. 禪房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하려 했으나 아이의 병으로 그곳을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공부에 진척이 없다는 사연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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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浩然 (19) |
李養源에게 보낸 편지이다. 병이 든 이양원에게 주자가 말했듯이 서책을 버리고 의약을 가까이 하라고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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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浩然-養源 (20) |
李養源에게 보낸 편지이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해서 얼굴도 잊을 지경이라면 더운 여름날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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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浩然 (21) |
李養源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권유가 湖上이 엮은 편지 등을 聯綴한 사연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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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浩然 (21) |
李養源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죽은 동생으로 인해 종종 傷害가 심해진다는 사연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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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浩然 (22) |
李養源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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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任六叔瑗 (23) |
任瑗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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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任六叔 (23) |
任瑗에게 보낸 편지이다. 나날이 쇠약해짐을 한탄하고 궁벽진 곳에서 舊讀殘書를 면치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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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任六叔 (24) |
任瑗에게 보낸 편지이다. 궁벽진 곳에서 칩거하면서 부귀와 어울리지 않는 임원의 빈궁함이 陋劣함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칭송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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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任六叔 (25) |
任瑗에게 보낸 편지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궁핍하면 詩에 능하다는데 任聖與가 궁핍한지 시가 매우 좋다는 사연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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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任六叔 (26) |
任瑗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忘晦翁이 말한 讀書時節이 아니면 단지 눈을 닫고 靜坐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말은 진실로 心力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인데, 임원의 재주가 작은 현을 경영하기에 마땅한지 생각하게 되었다면서 그에게 충고하는 말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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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任六叔 (27) |
任瑗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태수가 벼루라면 吏民은 묵인데, 剛이 柔를 제압할 수 없고 도리어 돌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니 이런 원리를 정사에 응용하라는 당부를 적은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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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尹奉化-光蘊 (28) |
尹光蘊에게 보낸 편지이다. 친척 누이동생의 죽음을 위로하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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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甥-良遇士常 (29) |
金良遇의 편지에 답한 글로 오래 소식이 없어 서로에게 잊혀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라며 안부를 묻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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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甥 (30) |
金良遇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양우 부인의 죽음을 위로하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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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南從叔-鶴聞 (31) |
南鶴聞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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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南從叔 (31) |
南鶴聞에게 보낸 편지로, 남학문의 할아버지 죽음을 위로하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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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南從叔-鶴耆永臾 (32) |
南鶴耆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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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遂而-萬夏 (32) |
鄭萬夏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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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景活-毅敬別紙 (33) |
李毅敬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장인을 보지 못한지 6,7년인데, 소식을 전하지 못한 사연을 적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공손하지 않은 것 같고, 말을 하려고 하면 한쪽으로 치우칠까 두렵지만, 불경스러운 침묵은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과 비슷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말은 情愛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이 장인에게는 구애받지 않으려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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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景活 (35) |
李毅敬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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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景活 (36) |
李毅敬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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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嚴翰林-璹幼文 (37) |
嚴璹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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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嚴幼文 (38) |
嚴璹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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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嚴幼文 (38) |
嚴璹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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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任典籍-珹 (39) |
任珹에게 보낸 편지이다. 임성 부자가 아들을 先으로 해서 과거에 급제하자 어린 나이에 高科하는 것을 옛 사람이 경계했다는 말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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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參奉-頤行丈 (40) |
金頤行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詩經》에서는 밭에 먹을게 없으면 벼루를 깬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관리는 어찌해서 벼루를 깨서 먹을 수 있게 하는 이가 없느냐며 경계의 말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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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南魯城泰憲 (40) |
南泰憲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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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元孝-命錫 (41) |
李命錫에게 보낸 안부편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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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戚丈-★〈氵+奭〉 (41) |
李★〈氵+奭〉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新宮에 불이 나면 삼일동안 곡을 한다는 뜻이 경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나는 일이어서 반드시 禮家의 定論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널리 고찰해 봐야 한다는 말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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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光欽 (42) |
鄭光欽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독서의 요체는 ‘熟復詳玩‘에 있다면 독서에 대한 말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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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宋之頀之楫兄弟 (43) |
宋之頀․宋之楫 형제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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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雷堂遺稿序 (1) |
1747. 집안사람인 解雷堂의 유고에 대한 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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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鄭玄老宰咸平序 (1) |
任㻐을 대신해서 지은 글이다. 鄭玄老가 咸平으로 부임하여 떠날 때, 그를 보내며 쓴 글이다. 정현노의 이름인 玄老와 고을 이름인 咸平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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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柳原明誠之游楊山序 (2) |
柳原明이 楊山로 놀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그곳 풍경을 적어오라고 부탁하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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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樂堂記 (3) |
자기 집에 二樂堂이라고 내건 이유를 설명했다. 산이 있다면 산은 빼어나고 물이 있다면 물은 맑으니 이 山水間에 집을 지어 물소리와 山色에 벗어나지 않으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기 때문에 二樂堂이라고 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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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潭記 (4) |
외삼촌이 玉潭을 齋號로 쓰는 이유에 대해 쓴 글이다. 玉潭은 원래 권유의 외고조부가 삼았던 齋號였는데, 그가 살던 지명에서 따온 것이었다. 외삼촌도 그곳에서 살았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으면서도 舊號를 계속 사용했다. 삼년을 어버이 뜻을 고치지 않으면 효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종신토록 그 뜻을 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실제 그런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하면서 외삼촌을 예로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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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齋記 (5) |
외삼촌의 德이 높은 것에 대해 쓴 글이다. 玉은 군자의 덕에 비유되며 외삼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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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忘窩記 (6) |
任聖與가 스스로 眞忘이라고 한 것에 대해 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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棄菴記 (8) |
1750. 棄菴이란 자기 호를 풀이한 글이다. 그는 窮貧하고 拙訥하여 나이가 들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방안에 앉아 지냈는데, 窮하기 때문에 達한 것은 버리고, 貧하기 때문에 富한 것은 버리고 拙하기 때문에 巧한 것은 버리고, 訥하기 때문에 辯한 것은 버린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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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志亭記 (8) |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정자를 세우고 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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愧窩記 (10) |
金地哉의 움집에 愧愧라고 걸려 있는 것에 대해 쓴 글이다. 빈궁한 김지재가 孝里에 머물면서 孝의 마을에 거주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의미로 그렇게 내걸었기에 그 愧자를 잘 썼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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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宗窩記 (11) |
鄭汝明이 자신의 집에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자, 권유가 和宗이라고 짓고 그 뜻을 설명한 글이다. 종친에 和하면 근본에 돈독해지고, 근본에 돈독해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다고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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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谷記 (12) |
陶谷이란 아마도 질그릇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던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錦水의 북쪽에 있는 도곡에 대해서 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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愼拙齋記 (12) |
庶族叔인 權君三이 자기 집에 愼拙이라 내걸자 쓴 글이다. 권유가 자신의 동생 이름을 拙이라 짓고, 사람이 자신을 지키는데 拙보다 좋은게 없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느냐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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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壇記 (13) |
친구 柳子强이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권유에게 글을 부탁하자 쓴 글이다. 미약함에서 시작해서 점점 나아가면 학문을 얻는 것처럼 돌을 쌓는 것에 그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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可齋記 (14) |
1769. 동생 權拙이 머물고 있는 계곡인 可齋에 대해서 동생이 묻자 대답한 글이다. 마을 어른들이 주변 산세가 자라(鰲)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자라는 방언으로 可齋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라는 물러남을 잘하는데 이것은 겸손과 비슷하며 겸손하면 공경하게 되는 뜻이 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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朔州寧塞館重建記 (15) |
朔州의 寧塞館을 중건한 사연을 기록한 글이다. 지금 朔州는 옛날에는 寧塞였는데, 건물이 옛날 이름을 땄다고 했다. 그 건물이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허물어졌는데 전임자가 새로 지으려 시도했지만 세월만 흘러 자신의 동생 權拭에게 와서야 비로소 중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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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朴士殷詩卷後 (17) |
친구 朴士殷의 시집에 쓴 발문이다. 박사은의 시들이 性情이 발현되는게 너무 자연스러워 사랑스럽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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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題士殷詩卷 (18) |
박사은 시집에 대해 다시 쓴 발문이다. 궁핍하면 시를 잘 쓴다는 말이 있는데, 권유 자신에게는 박사은의 궁핍함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고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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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吳伯降詩軸後 (18) |
1774. 같은 동네 친구인 吳伯降의 시집에 대해 쓴 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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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知舊書卷後 (19) |
1752. 오랜 친구들의 편지를 묶고 난 뒤 쓴 발문이다. 戚舊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인데, 이들을 항상 볼 수 없기 때문에 편지라도 보면 그들을 떠올릴 수 있어 그것을 묶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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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鄭六吾三絶帖後 (20) |
鄭六吾의 帖에 대해 숙부를 대신해서 쓴 글이다. 鄭六吾은 권유의 외가쪽 친척으로 詩畵가 뛰어났으나 전하는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다, 1740년에 雲藏寺 승려 性玄이 소장한 것을 발견하고 쓴 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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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金剛圖後 (21) |
금강산을 다녀온 愼齋 黃徵의 그림을 보고 쓴 발문이다. 권유가 弱冠에 금강산을 보고 싶었으나 빈한하고 병약해서 가지 못하다, 이제 37세가 되었는데도 더욱 빈약한 상황에 처해 안타까워하다, 황징의 그림을 보고 반가워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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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書鎭銘 (23) |
나무 書鎭에 대해 쓴 명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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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酬判書宗丈樀花樹會韻疊成三章 (23) |
집안 어른인 權樀에게 바치는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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兒孫琇字說 (24) |
손자 權琇의 이름을 풀이한 글이다. 琇란 옥(玉)이 빼어난(秀) 것이다. 군자의 덕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 옥만한 것이 없는데, 옥은 琢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자신을 잘 탁마하란 뜻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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兒孫琇婚書式 (24) |
손자 權琇의 결혼식 書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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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敬菴尹先生文 (25) |
1740년에 尹敬菴의 첫째 기일에 쓴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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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族祖文 (25) |
伯族祖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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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室李氏文 (26) |
1742년에 죽은 아내 龍仁 李氏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이씨가 죽었을 때 각각 12, 8, 7, 3살 먹은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둘이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도 많이 슬퍼하지만, 특히 막내가 젖을 먹지 못해 엄마를 찾는다고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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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谷山府使金洸文 (29) |
집안 친척 대신 쓴 것으로 1742년에 죽은 谷山府使 金洸의 죽음을 슬퍼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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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棠彦-之奭-文 (30) |
李之奭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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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戚弟蔡三謙-益恭-文 (30) |
蔡益恭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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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綾州牧使嚴公文 (31) |
庶再從 思碩 대신 쓴 것으로 綾州牧使인 嚴公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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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戚丈昌寧成公鎰小祥文 (32) |
成鎰의 小祥에 그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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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李孟博-錫溥墓文 (33) |
친구 李錫溥이 죽은 지 2년이 지난 1779년에 그의 무덤을 지나며 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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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申戚丈-洵文 (34) |
申洵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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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申戚丈-洵文 (34) |
申洵의 죽음에 대해 쓴 또 다른 제문이다. 신순이 70여세로 장수했지만, 가난하여 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가난했으면서도 그 궁핍한 것을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신순의 군자다움을 칭송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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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內從弟柳伯吳-翼鎭-文 (36) |
1756년에 31살로 병으로 죽은 柳翼鎭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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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幼文炳進士文 (37) |
1757년에 죽은 柳炳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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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尹進士-周幹-文 (38) |
尹周幹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글이다. 그이가 두세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마저 여의었을 때 그를 길러주고 가르쳐주었던 이가 尹周幹이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을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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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姑夫林進士文 (39) |
1758년에 고모부 林進士의 2주기에 그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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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亡女金氏婦文 (40) |
1758년에 28세의 나이로 죽은 그의 딸의 죽음을 슬퍼한 글이다. 그는 딸이 죽었을 때 병이나서 가지 못하고 3개월이 지나, 해를 넘긴 1759년에야 겨우 가게 되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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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尹參奉-學有-文 (41) |
尹學有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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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陶溪李浩然文 (41) |
李養源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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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尹弼良-光佑-文 (42) |
尹光佑의 죽음을 슬퍼한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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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厲氣祭告鳳鳴山神文 (42) |
厲氣를 쫓기 위해 鳳鳴山의 神에게 고한 제문으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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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告茂村後鬱古衆塚文 (43) |
동생 抑을 대신해서 쓴 것으로 茂村 뒤에 있는 연고자를 알 수 없는 여러 무덤을 두고 쓴 제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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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鳴山神祝 (43) |
여기를 쫓기 위해 鳳鳴山神에 고하는 축문으로 마을 사람을 위해 쓴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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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疑辨答 (44) |
禮에 관한 내용을 문답으로 적은 글이다. 柳綠․李邦一․申吉柱․權挻․黃星彦․吳彦輔․李喬年․權揆 등 8인이 예에 관하여 질문한 것들에 대하여 답한 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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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附2) |
林濟遠이 찬한 권유의 행장이다. (김대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