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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古書)

사마방목 병자식 신유갑계첩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8. 9. 7.

 

 품        명    병자식 사마방목(丙子式 司馬榜目)
크        기     21*32.5쎈치    금속활자본 
주       기   

조선시대에 설행되었던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 생원진사시가 있는데 그중에서 문과와 무과, 잡과 합격자에게는 등위에 따라 관직 또는 품계가 주어졌다. 그러나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관직 제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시험인데도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자 노력하였다.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에서의 공식 명칭은 생원진사시였으나 소과(小科), 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불렸다. 소과는 문과를 대과라 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대소과(大小科)라 하여 주로 문과와 같이 칭할 때 쓰였다. 감시는 고려시대 진사시를 국자감시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감시라고 한 용례는 사마방목이나 문과방목, 《양전편고(兩銓便考)》등의 법전, 실록 등 연대기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품       명    민응식 이근필등  간찰첩25장
크       기      21.5*31쎈치 25장
주       기     

민응식 [, 1844~?]
요약
조선 후기의 척신(). 임오군란 때 자택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했다. 민태호 등과 함께 수구파의 중심이 되어, 위안스카이 세력을 배경으로 개화파 타도에 힘썼다. 김옥균을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갑오개혁 때 유배되었다.
본관 여흥
우당
별칭 자 성문, 시호 충문
본문

본관 여흥. 자 성문(). 호 우당(). 시호 충문().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충주()의 자택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하였다. 1884년 친군후영영무() ·내무부협판사()에 이어, 1886년 이조 ·병조 판서를 지냈다. 민태호() 등과 함께 수구파()의 중심이 되어, 위안스카이[]의 세력을 배경으로 개화파() 타도에 힘썼다.

1891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방곡령()으로 황두() 배상문제가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고, 일본의 강압적인 태도를 규탄하였다. 갑신정변 때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자 자객을 밀파,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내각이 성립되자,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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