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명 민응식(閔應植)서간 18.11.코.구.30
크 기 46*27
주 기 신묘년 서간으로서
민응식(閔應植)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 별시1844년(헌종 10)
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장호원(長湖院)의 집을 민비의 피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길을 열었다.
이듬해 혜상공국총판(惠商公局總辦)·대사성, 1884년 친군후영영무(親軍後營營務), 이어 좌영사(左營使)·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1886년 이조판서·병조판서의 요직을 지냈다. 이때 민태호(閔台鎬) 등 척신들과 함께 수구파를 형성,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세력을 업고 개화파 타도에 앞장섰으며, 김옥균(金玉均)이 일본의 폭력배를 데리고 강화도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유포하여 민심을 소란하게 하였다.
뒤에 척족세도의 중심인물로서 민영익(閔泳翊) 등과 같이 위안 스카이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운동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1891년 예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방곡령(防穀令)으로 인한 황두배상문제(黃豆賠償問題)가 발생하자 이를 극력반대, 일본의 고압적인 태도를 규탄하였고, 민병석(閔丙奭) 등과 같이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하여 있던 김옥균의 암살을 모의, 장응규(張應奎)를 자객으로 밀파하여 살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통어사·도총제사·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이 성립되어 여러 척신들을 혁신파 인물들과 대치시킬 때 물의를 일으켜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당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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