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
한남서림(翰南書林), 大正5년(1916)
25.8x17cm, 29張, 목판본
앞표지 내지에 ‘歌啇樓原本 二十一都懷古詩 翰南書林藏板’이 있고, 뒤표지 안쪽에 판권지가 있다.
이덕무(李德懋)가 교정하였고, 1792년의 자서가 있다. 보존상태 양호하다.
조선 후기에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 43수로 단군의 왕검성에서 비롯하여 고려조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개의 왕도를 읊은 작품이다. [이십일도회고시]는 유득공이 31세였던 1778년(정조 2)에 [동국지지 東國地志]를 읽고 한 수 한 수 틈틈이 지은 것이다....단군조선의 왕검성 1수, 기자조선의 평양 2수, 위만조선의 평양 2수, 한(韓)의 금마(金馬) 1수, 예(濊)의 강릉 1수, 맥(貊)의 춘천 1수, 고구려의 평양 5수, 보덕(報德)의 금마저(金馬渚) 1수, 비류(沸流)의 성천(成川) 1수, 백제의 부여 4수, 미추홀(彌鄒忽)의 인천 1수, 신라의 경주 6수, 명주(溟州)의 강릉 1수, 금관(金官)의 김해 1수, 대가야의 고령 1수, 감문(甘文)의 개령(開寧) 1수, 우산(于山)의 울릉도 1수, 탐라의 제주 1수, 후백제의 완산 1수, 태봉의 철원 1수, 고려의 개성 9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득공은 조선의 실학자. 자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 호는 냉재(冷齋). 본관은 문화(文化). 일찍이 진사에 합격하여 1779년 규장각 검서가 되었으며, 포천ㆍ제천ㆍ양근 군수를 지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의 직함을 가져 세상에서 이덕무ㆍ박제가(朴齊家)ㆍ서이수(徐理修)와 함께 4검서라 불린다. 통정(通政)으로서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한 뒤 만년에 풍천 부사를 지냈다.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로 박제가ㆍ이덕무 등과 더불어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중국에서 문물을 수입ㆍ모방하여 산업 진흥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제가ㆍ이덕무ㆍ이서구(李書九)와 함께 한학사가(漢學四家)라고도 불렀다.(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