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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고싶은 여행지

[스크랩] 허난설헌의 묘에 다녀오다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7. 3. 23.

 


 

* 허난설헌의 묘비 *

 

중부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광주시 초월읍도로 옆에 깨끗하게 단장된 묘역이 있다.

이곳에 허난설헌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한 번 가봐야지 했는데,

말 그대로 문득 찾아 나섰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3리에 있다.

 

 


* 묘역 안내판 *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1589]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 별호 경번(景樊). 본명 초희(楚姬). 강릉(江陵) 출생. 균(筠)의 누이.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으며, 1577년(선조 10)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 일부를 동생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이상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이런 식으로 그녀를 소개하기엔 너무 도식적이다.

 


* 위에서 내려다 본 허난설헌의 묘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하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가 보다.

그녀의 生沒年이 말해주듯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 간 아까운 재원(才媛)이었다. 극심한 남녀차별로 인하여 교육의 기회조차 없었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만한 사회적, 문화적 환경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적 배경은 그녀의 불행한 삶을 예정하고 있다.

 


* 허난설헌 시비 *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했던가!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환경과, 불행한 결혼생활등은 그녀를 더욱 고독한 사람으로 만들어 갔을 것이다. 스물일곱해의 짧은 생이었지만, “규원가”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조선의 여인들 중  자신의 이름을 가진 몇 안되는 여인 중 한 사람이다. 지금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그녀의 시적재능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흔들었을 것이다. 남성위주의 봉건시대에, 더욱이 여인의 굴종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그녀의 재능은 차라리 시기와 비난의 대상이었다.

 


* 허난설헌의 묘 옆에 있는 먼저 간 자식들의 묘 *

그녀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딸을 먼저 잃고 희윤(喜胤)이라는 아들은 그 다음해에 잃게된다. 불행한 결혼생활뿐 아니라, 자식을 앞세우는 아픔을 겪게되고, 그녀는 임종시 “다시는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죽을 당시에도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 자식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비 *

 

哭子         아들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今年喪愛子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雙墳相對起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鬼火明松楸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魄   소지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玄酒奠汝丘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夜夜相追遊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테지

縱有腹中孩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한들

安可冀長成   이 또한 잘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血泣悲呑聲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許米子 번역 鄭良婉 쓰다

- 정리: 류주환

내용출처: http://kenji.cnu.ac.kr/my/chohee/life/life2.htm

 


* 가까이서 본 허난설헌의 묘 *

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즉 파자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고 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

  - 정리: 류주환

내용출처: http://kenji.cnu.ac.kr/my/chohee/life/life2.htm

 


* 허난설헌의 시 *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역)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 정리: 류주환

내용출처: http://kenji.cnu.ac.kr/my/chohee/life/life2.htm

허난설헌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분 -----> http://kenji.cnu.ac.kr/my/chohee/

-네이버 지식in에서 발췌-

 


* 허난설헌의 묘에서 남편의 묘역으로 올라가는 계단 *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 간 터라, 술 한 잔 올리지 못하고 온 것이 내내 섭섭하다. 묘역 옆에서는 무슨 사당을 짓고 있는지, 커다란 한옥모습의 건물을 짓고 있었다. 묘역은 3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맨 위쪽단에는 김성립(허난설헌의 남편)의 조부와 아버지의 묘가 있고, 중간단에는 김성립과 그의 동생묘가 있다.

그리고 맨 아랫단에 허난설헌과 그녀의 아들, 딸의 묘가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묘지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앞으로 근처에 있는 소개할 만한 묘지를 가 볼 예정이다.


음악/비창

2005/05/15 글/비온뒤에
출처 : 혼자 지껄이기
글쓴이 : 비온뒤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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