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국보 제6호)
중원탑평리7층석탑
국보 6호인 중앙탑이 위치한 사지로 남한강 바로 옆에 있는 이 절터에서는 1974년 이후 삼국 모두의 6잎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되어 중원문화가 삼국문화의 복합적 요소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중앙탑을 세우기 이전에 삼국시대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보상화문 기와와 당초문 암막새 기와가 찾아져 탑을 건립한 시기와 대략 일치하는 시기에 통일신라시대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앙탑과 사지에 대한 내력을 밝히기 위하여 1992~3년까지 2회에 걸쳐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절의 영역에 대한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중앙탑은 절 내부의 건물 배치를 위해 세워진 탑이 아닌 비보적인 풍수탑으로 추정되었다. 탑의 축대 위에 통일신라기의 연화문 석등 대석 1기와 조선시대의 가옥형 옥개석 1매가 있다. 주변에 많은 기와 조각과 벽돌 등이 흩어져 있었으나 공원화 되면서 절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존재하는 신라석탑으로서 가장 높은 석탑(14.5m)이며 탑평리 7층 석탑이라는 공식 명칭보다 『중앙탑』으로 더 많이 알려진 충주지방을 대표하고 있는 국보 6호의 문화재이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7층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를 구성한 정사각형으로 된 일반형 석탑이다. 남한강변에 높다란 축대를 쌓고 얕은 면석을 사방에서 2매씩 조립하여 모두 8매로서 기초부분인 지대석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모두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것은 이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이 탑은 기단부는 신라석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2중 구조로, 아래 기단부는 비교적 얕게 표현되어 면석의 모퉁이에 우주를 조각한 판석을 엇물림식으로 짰는데 두 면에는 양 우주에 탱주를 3개 표현했으나 다른 두 면에서는 2개의 탱주가 있으면서 우주와 탱주와의 거리 또는 탱주와 탱주사이의 거리 비율이 일정하지 않으며 벽면구성에 사용된 판석의 숫자 등도 일정하지 않다. 하대갑석은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낙수면을 이루었고 윗면에 몰딩형 받침과 그 위에 각형의 괴임이 조각되어 모두 2단으로 윗 기단부를 받치고 있다.
윗 기단부는 네 면이 각각 2개, 4개, 5개, 5개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탱주가 3개인 면과 4개인 면, 우주를 다른 돌로 조각한 쪽과 면을 구성하는 판석에서 조각한 것 및 우주에서 탱주까지 탱주와 탱주 사이의 거리비율이 일정하지 못한 것 등 질서있게 짜여지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갑석은 2매의 큰 판석으로 전체를 구성했는데 지금은 여러 곳이 균열되어 있으며 윗면은 하대갑석과 같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낙수면을 이루고 있다. 밑면에는 갑석부연을 조각하였고 낙수홈이 조각되어 있다. 윗면에 3단으로 된 탑신 괴임이 있는데 얕은 1단 위에 비교적 높게 조각된 몰딩형의 2단 괴임이 있고 그 위에 3단의 괴임이 조각되었으며 그 위에 다시 다른 돌로 초층탑신 괴임석을 놓고 있다.
큰 탑이므로 탑신부도 아래층은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하였는데 1층 탑신은 각면의 우주가 모두 다른 돌로 짜여져 있으며 벽면은 균등한 2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다. 그러나 2층 탑신 남쪽과 서쪽에는 벽면이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양 우주 폭의 비율이 같은데 비해 동. 북쪽면에서는 규모가 다른 2매의 판석으로 벽면을 조립했으며 우주의 폭도 크기가 같지 않고 북쪽면은 오른쪽에 있어야 할 우주의 표현이 생략되었다.
옥개석의 짜임새는 1층에서 3층까지가 4매의 석재로서 균등하게 조립하여 1조를 이루고 있으며 4, 5층의 옥개석은 북쪽면이 돌 한 개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는 3석으로 조립되었고 6, 7층은 탑신의 벽면과 함께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있다.
각층 옥개석의 선은 대체로 평행하다가 끝 부분에서 반전되는 형태이며 반전된 곳에는 3개씩 풍경 원공이 뚫려져 있고 옥개받침의 층급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어 오래된 방식의 탑임을 나타내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있는데 노반은 2중 구조로 되어있고 복발에는 중앙에 2줄의 선이 돌기되었으며 동쪽 부분이 파손되어 보수한 흔적을 보인다. 앙화는 밑면은 정사각형이고 위로 향하면서 연잎이 넓어진다.
이 석탑은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기단부와 탑신부의 세부수법에 있어서 약식과 생략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도 높이에 비해 폭의 비례가 적어서 매우 높은 느낌을 준다.
1917년 이 석탑에 대한 전면 해체 복원이 진행될 때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유물 중 청동거울 2 점은 고려시대의 조성품으로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은 건립 이후 고려에 이르러 재차 사리 장치의 봉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기단부에서도 청동제 사리기가 나왔는데 이는 탑을 건립할 당시인 통일신라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주변 상황을 살펴보면 현재 탑 기반의 높이가 지면 보다 무려 10~3m 정도 높게 조성되어 있으나 1917년 탑의 전체적인 보수작업 때 촬영된 사진이나 1972년 대수해 직후에 촬영된 사진에는 현재와 같이 높지 않으며 수해로 외형이 손상된 시기의 사진에는 잡석으로 약 2~3m의 단을 쌓고 지대석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지에서도 보면 절터와 접해 있는 집들과 탑 축대의 높이가 거의 일치함을 볼 때 처음에는 기단이 그리 높지 않다가 사지가 수차 범람되어 표토가 많이 깎여나가고 상대적으로 단단히 다져진 기반을 가진 탑 아래 부분은 보존이 어느 정도 되어 탑과 축대가 더욱 우뚝해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현지주민들의 증언과 절터의 낮은 땅에서 삼국기의 와당이 더 많이 수습된 점으로도 짐작되는데 그 이유는 표토나 한 층 아래에 있던 후대의 와당들은 수해에 의해 점차 쓸려나가고 그 아래층에 있던 고대의 와당들이 72년 이후 새롭게 드러나 수습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성 시기를 살펴보면 형식적인 면에서 기단부가 상당히 크게 만들어진 점, 탑의 비율이 일정하지 않고 여러 부분에서 혼돈한 점, 탑신과 옥개석이 고층으로 가면서 구성하고 있는 돌의 수가 줄어드는 현상, 탱주를 조각한 점, 전형적 3층이 아닌 다층형 석탑이 된 점 등을 볼때 전설과 관련되어진 원성왕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8세기 후반경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탑 상륜부
중원(충주) 땅은 남한강 수로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곳이다. 남한강의 물길은 뱃길로서 문화교류의 통로이고, 배가 닿던 나루터는 문화의 집약적 길목이었다.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던 배는 나루터와 함께 물자교류의 매개수단이었다. 남한강은 조선 건국 이전에는 수도권 배후지로 있으며, 남북 세력의 경합지였고, 조선 초기부터는 수도권의 생산물 공급지 또는 생필품 교류지 였다. 뱃길은 뗏목, 세곡(稅穀) 등을 상류에서 하류로, 소금, 새우젓 등을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시키던 물길의 상징이었다. 적어도 중원인은 조선시대 이후에 남한강 교류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고로, 탑평리의 중앙탑(국보 제6호)는 이런 문화의 총체적 상징이다. 중원경(中原京)에서부터 나온 중앙의식은 자기 중심의 자존의식을 불러 넣은 계기가 되었다. 이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면서 이 지역을 서울 중심의 변방이기 보다는 서울 이외의 또 다른 교류의 중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각공원에서 본 중앙탑
국보 제6호로 지정된 중앙탑을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과 조각작품들이 어우러져 역사와 예술의 향기가 그윽하다. 아이들에게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맘껏 뛰놀 수 있는 여유로운 소풍장소로 더없이 좋고, 연인들에겐 기억에 남는 데이트 장소가 될 만하다. 또 공원 안에 충주박물관과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남한강 수석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중앙탑을 보는 이들은 그 늘씬한 규모에 먼저 놀란다. 게다가 인위적으로 조성한 높다란 축대를 지반으로 하고 있어 ‘우러러’ 봐야 하는 양상이라 더욱 느낌이 높고 크게 다가온다. 높이는 14.5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석탑으로, 화강암으로 된 2층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이뤘다. 국보 제6호. 신라 원성왕 12년에 건립됐다고 하는 중앙탑의 정식 이름은 중원 탑평리 7층 석탑. 이 탑을 건립한 시기인 통일신라시대 때 이 곳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해 중앙탑으로 불려졌다. 당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탑을 세워 신라의 영토임을 널리 알렸다. 그 가운데 중앙탑은 고구려의 국원성이었던 이 지역에서 신라의 강한 모습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중앙탑과 관련해 두 가지 전설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이 지역에 왕이 태어날 기운이 있다고 해 그 기운을 없애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라의 고승 김생이 이웃 반송산에 사찰을 세우고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당시 신라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걸음속도가 같은 두 사람을 동시에 출발시켰더니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이 곳에 도착했으며 그 때부터 중앙탑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중앙탑 탄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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