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균(申益均)에 대하여 | |
1879(고종 16)∼1939. 조선 후기의 사인.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과암(果庵). 1879년(고종 16) 3월 11일 충주(忠州) 노은(老隱)에서 신태덕(申泰德)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5대조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회(申晦)이다. 38세인 1916년에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1917년에 그는 목천(木川) 파악산(巴嶽山)으로 이주한 이후 1939년 6월 29일 향년 61세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고 후배를 양성하였다. 과암은 32세 때 화서학파(華西學派)의 금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스스로 화서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여 화서와 자신의 학문적 입장이 일치함을 말하고 있다. 과암은 성문삼현(省門三賢)의 한 사람이었던 금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금계가 의병활동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과암도 60평생을 산촌에 차분히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화서학파의 학설들을 전개시키고 정립시켰다. 그는 또한 서양의 문물에 저항하는 명확한 이론을 전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까지 비판하고 있다. 스승인 금계가 별세한 40세 이후에는 당시 만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습재(習齋) 이직신(李直愼)을 스승으로 받들어 편지를 통해 성리설을 비롯한 학문적 토론을 계속하면서 학문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는 비교적 은둔적 태도를 보여 다만 학문적 입장이나 지연적으로 가까웠던 윤응선(尹應善), 신현국(申鉉國) 등과 학문적 교유를 하는데 그쳤으나, 간재학파(艮齋學派)와의 논쟁에는 극히 예리하고 치밀한 분석으로 반박과 비판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도덕규범을 관념적 체계로 인식한다고 도덕이 실현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실천의지가 도덕의 실현에 요구되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의리의 실천적 관심과 성리의 근원적 관심을 일관시키려는 과암의 학문적인 입장은 〈인물성동이변(人物性同異辨)〉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인성과 물성의 동이 여부에 대한 호락론(湖洛論)의 해묵은 논쟁을 지양하면서, 그는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하여도 옳고 다르다고 하여도 옳다고 하면서 양쪽이 각각의 정당한 근거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이론을 주장하거나 다르다는 이론을 주장하면 한쪽에 치우쳐 정당성을 잃는다고 주장하였다. 곧 동론을 주장하여 차이를 버려두면 인(仁)에 지나쳐 의(義)에 흠이 있는 것이 되고, 이론을 주장하여 같음을 빼놓으면 의에 지나쳐 인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성리학적 관심의 초점은 항상 심(心)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형(形), 기(氣), 신(身), 리(理)의 개념이 모두 심에 연관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심을 기질과는 엄격히 분별하였다. 곧 기질은 맑은가 흐린가의 물질적 구성조건이지만 심은 신명하고 영각하는 능력이며, 심이 이기의 통합으로서 주재적 기능을 근본 성격으로 내포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낙론(洛論)의 심즉기질설이나 낙론의 심즉기설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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