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올림
-1894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 ·제천 등지에서 부패관리들을 죽였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
-1895
충북 제천에서 거의, 의병장으로 활동
-1898
다시 만주로
-1905∼1908
일제에 대항, 의병항쟁을 격문으로 독려
-1909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도총재에 추대되어 이상설 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침공을 기도하던 중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뒤에 석방
-1910
연해주 지역 13도의군 도총재 성명회 회장
한말 민족수난기에 항일 구국항쟁의 대열에 섰던 선열로서 그 기백이 장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유인석 선생은 한민족의 사표가 될 만큼 철저한 항일의식을 분출하였고, 또 이를 시종일관 실행해 간 인물이었다.
의병항쟁의 기간은 대체로 1894부터 20여 연간에 걸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시기는 선생이 의병항쟁의 기치를 든 이후 서간도에서 작고할 때까지의 기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선생이 거의(擧義)하면서 본격적인 항일 의병항쟁이 개시되었고, 선생의 임종과 함께 의병항쟁도 종식되었다고 할 만큼 선생은 의병항쟁의 상징적 인 분이다.
선생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柯亭里)에서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申)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柳榮五)가 잠강(潛江)에 은거하고 있던 당대의 거유(巨儒)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입양되던 그해에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화서 문하에는 금천(錦川) 임규직(任圭直)· 단구(丹邱) 이인구(李寅龜)·괴원(槐園) 이준(李埈, 화서의 장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등의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다. 선생으로서는 최고의 학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선생은 훗날 화서학통을 이어받는 김평묵· 유중교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선생은 일찍부터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 점은 선생의 나이 24살 때인 1865년에 숭명존화(崇明尊華)의 상징이었던 만동묘(萬東廟)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자,
"아, 슬프도다. 이제 양이(洋夷)가 횡자(橫恣)해 사방에서 음사(淫邪)가 점차로 이를 것이니, 큰 의리가 한번 흐려지면 큰 제방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라고 탄식하면서 이를 대변고(大變故)로 인식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또 1868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인양요 때에는, 유림의 대변자 로서 조정에 소환된 스승 이항로를 따라 상경,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뒤 쇄국정책을 견지하던 대원군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1876년 일제의 강압으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국침략의 제1보를 내디뎠던 것이다. 양국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선생을 비롯한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은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다. 결국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어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지만, 이 상소는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1893년 선생은 향리인 가정을 떠나 제천 장담(長潭 : 충북 제원군 봉양면 장담리)으로 이사했다.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강학(講學)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 1893년 작고하자, 선생은 유중교가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이거해 온 것이었다. 얼마 뒤 선생은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 무렵 일제는 청일전쟁을 개시하는 한편 김홍집(金弘集)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한국의 내정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함 으로써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이때의 개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식 복제로 개정한 의제개혁(衣制改革)은 유생들을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선생도 이러한 의제개혁을 다음과 같이 통열히 비판하였다.
아, 슬프도다. 4천년 화하정맥(華夏正脈)과 2천년 공맹대도(孔孟大道)와 조선 5백년 예악전형(禮樂典型)과 가가(家家) 수십세 관상법도(冠裳法度)가 이제 끊어졌도다. 글읽는 선비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겠는가. 이 변복(變服) 은 천지·성현· 선왕·부조(父祖)에 죄를 짓는 것이라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 이제 성토(聲討)하다 죽고 거의(擧義)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지키다 죽는 것은 선비의 의리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제는 그들이 한국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여겼던 명성왕후 민비(閔妃)를 무참히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는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 을 바꿈과 동시에 성인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斷髮令)을 내렸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의병항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선생의 의병항쟁은,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變故)'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윤 5월 2·3일 양일간에 원근(遠近)의 문인 사우(門人士友) 수백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講習禮)와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이 행사는 이후 11월 거의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쟁의 준비단계였으며 후일의 거의에서도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 열린 향음례, 강습례에서 선생은 당시와 같은 '만고에 일찍이 없었던 큰 변고(萬古所無之大變)'에 정당하게 처신할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행동 방안, 곧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행동강령에 따라서 이필희(李弼熙)와 안승우(安承禹)는 거의를 주장 했고, 양두환 (梁斗煥) 이하 몇 사람이 자정을 결심하였다. 주용규(朱庸奎) 오인영(吳寅泳)·박정수(朴貞洙)·이조승(李肇承)·이정규(李正奎) 등은 선생을 따라 서간도로 들어가 수의하기로 결심하였다. 선생이 이때 보다 적극적인 행동방안인 거의나 자정을 택하지 않고 거수(去守)를 결심한 이유는 당시 양모인 덕수(德水) 이씨의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선생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은 먼저 문인들의 거의에서 유래한다. 즉 선생의 문인들인 괴원(槐隱) 이춘영(李春永)과 하사(下沙)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金伯先)의 포군(砲軍)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호좌 의병진의 발단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제천에서 서상렬·이필희 신지수(申芝秀)·이범직(李範稷) 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1월 22일 단양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혼성부대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고, 안승우는 영동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전력의 분산을 막고자 전령을 보내 이들을 모두 영월로 모이게 했다. 영월에서 회합한 이필희 이하 이춘영·서상렬·안승우 등은, 거수(去守) 발정(發程)을 포기하고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선생에게 간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복수보형(復讐保形 :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 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선생은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고 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사방의 義氣를 고무하는 한편, 아래와 같이 의병진을 개편하여 본격적인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의병대장 : 유인석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 안승우 후 군 장 : 신지수 선봉장: 김백선 조련장(操鍊將) : 안성해(安成海) 참 모 : 박주순(朴胄淳) 사객(司客) : 장충식(張忠植) 종사(從事) : 이조승·홍선표(洪璇杓)·이기진(李起振)·정화용(鄭華鎔)
이 호좌의병진은 거의 초기에 안승우·이필희·이춘영 등이 모집한 지평 의병 400여명을 주축으로 하고 화서연원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단위의 소규모 의병진들이 연결 되어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선생은 제천으로 회군해 곧바로 충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선생은 당시 친일 개화파 관리로 알려진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등 이른바 토왜(土倭)들을 참수, 친일개화정책을 펼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호서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이고 더욱이 그곳에는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명, 지방군이 400명이나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뒤로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승지 우기정 (禹冀正)과 이호승(李鎬承)이 각각 3천명, 5백명의 병력을 원조해 와 군사수는 일본군과 관군측에 비해 우세하였다. 하지만 실제 총을 가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하여 신식 병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감행 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과 일본군은 항전을 포기하고 탈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충주성에 입성한 선생은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는 한편,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또한 의병진의 세력을 확장 시키기 위해 서상렬·원용정(元容正)·홍선표 등을 영남 으로, 이범직(李範稷)을 호서로 각각 소모사(召募使)로 파견하여 각지의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은 안동·예천·봉화·순흥 풍기·영천 등지의 의병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상주 태봉(台峰)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 하였고, 이범직은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였다.
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그 뒤 의병진은 계속되는 접전으로 전력이 소모된 데다가 보급로를 차단당해 물자조달에 어려움이 커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의 의병진은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고 말았다.
선생의 호좌의병진이 제천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처에서 활동 하고 있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李康秊) 영춘의 권호선(權灝善), 원주의 한동직(韓東直), 횡성의 이명로(李明魯) 등의 의병장들이 각기 일군을 거느리고 선생 의병진에 합류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진은 이후 5월 26일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수안보·가흥·음성·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 과 활발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선생이 충주·제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항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중앙의 정국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래로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고종 황제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틈을 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 으로 파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윤치호(尹致昊) 등을 중심으로 친러 내각이 조직되었다. 새 내각은 그 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코자 단발령 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방으로 선유위원(宣諭委員)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 시켰다.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올림
-1894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 ·제천 등지에서 부패관리들을 죽였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
-1895
충북 제천에서 거의, 의병장으로 활동
-1898
다시 만주로
-1905∼1908
일제에 대항, 의병항쟁을 격문으로 독려
-1909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도총재에 추대되어 이상설 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침공을 기도하던 중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뒤에 석방
-1910
연해주 지역 13도의군 도총재 성명회 회장
한말 민족수난기에 항일 구국항쟁의 대열에 섰던 선열로서 그 기백이 장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유인석 선생은 한민족의 사표가 될 만큼 철저한 항일의식을 분출하였고, 또 이를 시종일관 실행해 간 인물이었다.
의병항쟁의 기간은 대체로 1894부터 20여 연간에 걸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시기는 선생이 의병항쟁의 기치를 든 이후 서간도에서 작고할 때까지의 기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선생이 거의(擧義)하면서 본격적인 항일 의병항쟁이 개시되었고, 선생의 임종과 함께 의병항쟁도 종식되었다고 할 만큼 선생은 의병항쟁의 상징적 인 분이다.
선생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柯亭里)에서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申)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간 선생은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柳榮五)가 잠강(潛江)에 은거하고 있던 당대의 거유(巨儒)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입양되던 그해에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화서 문하에는 금천(錦川) 임규직(任圭直)· 단구(丹邱) 이인구(李寅龜)·괴원(槐園) 이준(李埈, 화서의 장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등의 인물들이 운집해 있었다. 선생으로서는 최고의 학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선생은 훗날 화서학통을 이어받는 김평묵· 유중교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선생은 일찍부터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 점은 선생의 나이 24살 때인 1865년에 숭명존화(崇明尊華)의 상징이었던 만동묘(萬東廟)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자,
"아, 슬프도다. 이제 양이(洋夷)가 횡자(橫恣)해 사방에서 음사(淫邪)가 점차로 이를 것이니, 큰 의리가 한번 흐려지면 큰 제방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라고 탄식하면서 이를 대변고(大變故)로 인식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또 1868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인양요 때에는, 유림의 대변자 로서 조정에 소환된 스승 이항로를 따라 상경, 한 달 가량 서울에 머물면서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뒤 쇄국정책을 견지하던 대원군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1876년 일제의 강압으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국침략의 제1보를 내디뎠던 것이다. 양국 대표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선생을 비롯한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은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다. 결국 이들의 요구는 묵살되어 조약은 체결되고 말았지만, 이 상소는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1893년 선생은 향리인 가정을 떠나 제천 장담(長潭 : 충북 제원군 봉양면 장담리)으로 이사했다.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강학(講學)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 1893년 작고하자, 선생은 유중교가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이거해 온 것이었다. 얼마 뒤 선생은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 무렵 일제는 청일전쟁을 개시하는 한편 김홍집(金弘集)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한국의 내정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함 으로써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이때의 개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식 복제로 개정한 의제개혁(衣制改革)은 유생들을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선생도 이러한 의제개혁을 다음과 같이 통열히 비판하였다.
아, 슬프도다. 4천년 화하정맥(華夏正脈)과 2천년 공맹대도(孔孟大道)와 조선 5백년 예악전형(禮樂典型)과 가가(家家) 수십세 관상법도(冠裳法度)가 이제 끊어졌도다. 글읽는 선비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겠는가. 이 변복(變服) 은 천지·성현· 선왕·부조(父祖)에 죄를 짓는 것이라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 이제 성토(聲討)하다 죽고 거의(擧義)하다 죽으리니, 선왕의 도를 지키다 죽는 것은 선비의 의리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제는 그들이 한국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여겼던 명성왕후 민비(閔妃)를 무참히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는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 을 바꿈과 동시에 성인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斷髮令)을 내렸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의병항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선생의 의병항쟁은,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變故)'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윤 5월 2·3일 양일간에 원근(遠近)의 문인 사우(門人士友) 수백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講習禮)와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이 행사는 이후 11월 거의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쟁의 준비단계였으며 후일의 거의에서도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 열린 향음례, 강습례에서 선생은 당시와 같은 '만고에 일찍이 없었던 큰 변고(萬古所無之大變)'에 정당하게 처신할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행동 방안, 곧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행동강령에 따라서 이필희(李弼熙)와 안승우(安承禹)는 거의를 주장 했고, 양두환 (梁斗煥) 이하 몇 사람이 자정을 결심하였다. 주용규(朱庸奎) 오인영(吳寅泳)·박정수(朴貞洙)·이조승(李肇承)·이정규(李正奎) 등은 선생을 따라 서간도로 들어가 수의하기로 결심하였다. 선생이 이때 보다 적극적인 행동방안인 거의나 자정을 택하지 않고 거수(去守)를 결심한 이유는 당시 양모인 덕수(德水) 이씨의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선생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은 먼저 문인들의 거의에서 유래한다. 즉 선생의 문인들인 괴원(槐隱) 이춘영(李春永)과 하사(下沙)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金伯先)의 포군(砲軍)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호좌 의병진의 발단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제천에서 서상렬·이필희 신지수(申芝秀)·이범직(李範稷) 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1월 22일 단양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혼성부대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고, 안승우는 영동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전력의 분산을 막고자 전령을 보내 이들을 모두 영월로 모이게 했다. 영월에서 회합한 이필희 이하 이춘영·서상렬·안승우 등은, 거수(去守) 발정(發程)을 포기하고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선생에게 간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복수보형(復讐保形 :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 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선생은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고 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사방의 義氣를 고무하는 한편, 아래와 같이 의병진을 개편하여 본격적인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의병대장 : 유인석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 안승우 후 군 장 : 신지수 선봉장: 김백선 조련장(操鍊將) : 안성해(安成海) 참 모 : 박주순(朴胄淳) 사객(司客) : 장충식(張忠植) 종사(從事) : 이조승·홍선표(洪璇杓)·이기진(李起振)·정화용(鄭華鎔)
이 호좌의병진은 거의 초기에 안승우·이필희·이춘영 등이 모집한 지평 의병 400여명을 주축으로 하고 화서연원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단위의 소규모 의병진들이 연결 되어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선생은 제천으로 회군해 곧바로 충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선생은 당시 친일 개화파 관리로 알려진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 등 이른바 토왜(土倭)들을 참수, 친일개화정책을 펼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호서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이고 더욱이 그곳에는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명, 지방군이 400명이나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뒤로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승지 우기정 (禹冀正)과 이호승(李鎬承)이 각각 3천명, 5백명의 병력을 원조해 와 군사수는 일본군과 관군측에 비해 우세하였다. 하지만 실제 총을 가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하여 신식 병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감행 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과 일본군은 항전을 포기하고 탈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충주성에 입성한 선생은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는 한편,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또한 의병진의 세력을 확장 시키기 위해 서상렬·원용정(元容正)·홍선표 등을 영남 으로, 이범직(李範稷)을 호서로 각각 소모사(召募使)로 파견하여 각지의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은 안동·예천·봉화·순흥 풍기·영천 등지의 의병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상주 태봉(台峰)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 하였고, 이범직은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였다.
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그 뒤 의병진은 계속되는 접전으로 전력이 소모된 데다가 보급로를 차단당해 물자조달에 어려움이 커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의 의병진은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고 말았다.
선생의 호좌의병진이 제천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처에서 활동 하고 있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문경의 이강년(李康秊) 영춘의 권호선(權灝善), 원주의 한동직(韓東直), 횡성의 이명로(李明魯) 등의 의병장들이 각기 일군을 거느리고 선생 의병진에 합류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진은 이후 5월 26일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수안보·가흥·음성·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 과 활발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의 활약은 특히 두드러졌다.
선생이 충주·제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항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중앙의 정국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을미사변 이래로 친일내각에 포위되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고종 황제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틈을 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 으로 파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윤치호(尹致昊) 등을 중심으로 친러 내각이 조직되었다. 새 내각은 그 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코자 단발령 을 철회하는 한편, 각 지방으로 선유위원(宣諭委員)을 파견해 의병을 해산 시켰다.
내용출처 : 엠파스
출처 : 충주전통문화회
글쓴이 : 동수마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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