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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고싶은 여행지

[스크랩] 경종대왕 태실(충주엄정면 괴동리)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7. 5. 21.

경종대왕 태실이 있는 태봉

 

엄정면에 분포되어 있는 문화유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석마을에있는 '대지국사비'와 행정마을 건너편에 있는 '경종대왕 태실'이다. 태실이란 원래 왕, 왕비, 대군, 왕세자, 왕손이나 공주들이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예로부터 태는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하여 태아를 출산한 뒤에도 태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는데 왕실의 경우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하여 항아리에 태를 안 치시키는 것이 통례였다.

 

왕세자나 왕세손은 보위에 오를 것이라 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태를 태실까지 봉안하는 의식도 그러하거니와 태를 봉안할 장소가 길지(吉地)여야 했고, 봉송하는 날과 땅을 파는 날도 길일을 택하였다.

 

태를 옮기게 되면 봉송관원을 임명하였는데, 그는 상당관으로 태를 무사히 봉송하는 책무가 막중하게 지워졌다. 도중에 변고가 생길지도 모르는 불안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태실을 안칠 자리인 토지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 토제(告后土祭)와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등의 제례를 지냈다.

 

이때 태실 주변에사람의 접근이나 벌목, 개간, 채석을 막기 위해 금표를 세웠는데 금표를 세우는 범위도 신분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왕은 300보, 대군은 200보,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로 정하였다고 한다. 할 구역의 관원은 봄가을 두 차례 태실을 순행하였다. 이상유무를 확인하여 상부에 보고토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태실이 고의로 훼손되었거나 벌목을 하거나 화전을 일구는 경우가 생겼을 시에는 국법에 의하여 엄중히 다스렸다. 우리나 라에서 태실이 가장 많은 곳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서진산으로조선왕실 13위의 태실이 있어 세칭 태봉이라고 한다. 엄정면에도 비석마을에 있는 경종대왕의 태실과 주동마을 앞산에 인조의 왕자로 조귀인의 몸에서 출생한 숭성군 징과 둘째인 낙선군의 태실로 추정하는 태실비가 있다.

 

태를 봉안했던 태항아리는 흔적도 없어지고 다만 비만 쓸쓸하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면 왕족이 아닌 일반인들은 어떻게 태를 처리하였을까? 왕족이 아닌 일반인 들은 아기 몸에서 태를 잘라 내면 곧바로 마당에 왕겨를 퍼다 쌓고 그 안에 태를 묻고 태웠었다. 이때에 태가 타는 시간은 만 하루가 걸렸고, 태가 타고난 재는 강물이나 큰 개울물에 띄워 보냈다.


하마비

경종대왕태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6호 (충주시)
명     칭 경종대왕태실(景宗大王胎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75.08.2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34-1
시     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충주시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모시는 곳으로, 이곳은 조선 경종대왕의 태를 모시고 있었다. 대개는 태항아리 안에만 두는 것이 보통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따로 돌방을 만들어 그 안에 넣어두게 한다.

이 태실은 8각의 낮은 받침돌 위로 둥근 돌방을 올리고 8각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옆에 태실비를 세워 놓았다. 영조 2년(1726) 왕의 명을 받아 태실 주위에 8각형 돌난간을 두르고 비석을 세웠으며, 순호군 16명을 두고 3년마다 제사를 올렸다.

숙종 14년(1688)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은 후 이 곳에 처음 마련해 두었으며, 일제강점기에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옮겼던 것을 1976년에 제자리로 옮겨 복원해 놓았다. 돌방 안에 있던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이 곳에는 석조물과 태실비만 남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태 항아리




임금이 되기전에 태실


태실비

태실비귀부좌대

뒷모습

이수


 

 

 

 

찾아 가는길

엄정면 소재지에서 면사무소쪽 길(추평방면)을 잡아 2차선 포장도로를 10분 정도(차량이용 시)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비석마을이라는 버스 정류소와 비석마을 진입로가 있다. 비석마을로 진입하면 정류장까지 잘 갖추어져 있다. 마을 뒤편 과수원 언덕 위로 억정사 비석이 있고 좁은 농로지만 계속 따라 들어가면 경종대왕 태실비와 백운암이 나온다


-경종대왕-

경종시대 -

1720년 6월 : 왕세자 균, 즉위함 (33세)

 

1720년 10월 : 삼남의 양전을 끝냄

 

1720년 11월 : 청의 사신이 옴

                    조태구가 김창집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림

                    최창대, 민진후 죽음

 

1720년 : 노론대신들,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한것은 숙종의 업적이라며

             말해 경종에 마음이 상함

 

1721년 7월 : 노론 김창집, 이건명 등이 새벽 경종과 면담하여 반협박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성공함

                  선의왕후, 소론과 손을 잡고 경종의 양자를 들여 노론을 견제

                  하고 왕위계승권을 가지려 함

 

1721년 : 노론의 주청으로 왕세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경종이 허락했

             지만 몇일뒤에 경종이 대리청정을 금함  

 

1722년 : 소론의 목호룡이 노론에서 경종을 3급수의 방법으로 독살하거나

             내쫓고 이이명을 왕위로 추대한다는 고변을 함

            (목호룡이 소론이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이같은 고변을 함)

            3급수란 하나는 자객을 시켜 죽이는 대급수, 독약을 사용하는 소급

            수, 숙종의 유명을 빙자해 폐출시키는 평지수를 계획했다는 것.

            임인년에 일어났다해서 이 사건은 "임인옥사"라고도 불림

            이 사건으로 노론의 4인방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체 등 노론

            4대신으로 모두 사형당함

            소론, 권력 장악함. 이 사건으로 노론의 4인방을 비롯해 엄청난

            대신들이 유배, 사사당하기에 이름

            소론, 경종에게 노론의 핵심인물인 왕세제 연잉군을 사사하라고

            함. 경종도 한때는 연잉군을 의심하고 그를 믿지 않았지만 참아

            죽일 수는 없었음

 

1724년 8월 : 경종, 원래 소화기능이 좋지 않았던데다가 그날따라 몸이

                  급속도로 안좋아짐

                  어의에서 올린 게장과 단감 등을 식사로 한 다음, 좋아졌다가

                  복통과 설사가 연이어 계속된 뒤 37세의 나이로 새벽에 승하함

 

* 특징 : 노론,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음

            반협박으로,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까지

            성공했지만, 경종과 소론이 힘을 합세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해

            수많은 노론 인사들을 유배, 사사함

            그 뒤 소론이 권력을 장악하는 등, 노론과 소론간의 다툼이 조선에

            있어서 절정에 달함

            왕세제 연잉군, 임인옥사의 주범으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경종의 배려로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함

            경종의 죽음은 어의와 왕대비 김씨(인원왕후), 왕세제 연잉군간의

            다툼이 있었고 게장과 단감을 먹은 경종이 승하해 독살설의 의심

            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가 불충분함

            후에 경종의 릉을 노론 대신이 지나가자 그 대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안하는 불손을 태도를 보임

 

정식칭호 :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릉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 (懿陵)

자녀 : 없음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


희빈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 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 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종의 즉위와 소론정권의 부흥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 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측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런데 노론측은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측이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아들였다가 소론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 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의 조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 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 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노론의 타격과 신임사화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 3개월 뒤인 1722년 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단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 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었 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 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반하여 이같은 음모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 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은 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의 가족이 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윤선거와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등을 숙종묘에 배 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경종의 업적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출처 : 충주전통문화회
글쓴이 : 동수마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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