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鳳停寺)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한줄로 나란히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탱하는 지붕을 가진 건축물이란 뜻을 가졌으며 불가에서는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신성한 사찰에 들기전에 올바른 마음가짐 부터 갖추라는 뜻이려니...일주문을 중심으로 지금 서있는 이자리는 중생들이 사는 세상이요,
들어가면 해탈한, 깨달은, 구도자들의 세상이 되는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서 오른쪽 계곡옆에 있는 누석단(累石壇)은 풍수적으로 볼때 지세가 허한쪽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바닥에 떨어진 돌 찾아서 보탠다.
누석단 지나고 우물이 있는 주차장을 지나면서 마주치는 만세루(萬歲樓)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했다. 능인대사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그래서 봉황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했다고 한다.
만세루에서 계단을 천천히 오르면 대웅전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대웅전은 조선초의 건물로 알려져 있지만 공민왕 피난시절 왕실 차원에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고려 태조 께서 다녀 가셨다는 설도 있으니 역사는 더 오래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불자들이나 특별한이가 아니면 찾는 사람이 뜸한 곳이었으나 영국여왕이 다녀갔고, 사실 공민왕께선 이미 오래전에 다녀 가셨지만, 동승이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최근의 황진이 같은 영화를 찍어서 사람들이 더욱 많이 드나 드는것 같다. 안동 사람들은 봉정사 뒷산을 운동삼아 가볍게 오르기도 하는데 내려오는 길은 거의가 누석단이나 명옥대 쪽으로 빠지는데 이는 봉정사 가람안에 드는 곳이다.
무량해회(無量海會)는 승방이다.
목탁(木鐸)은 목어(木魚)가 변형된 것으로 불공을 드리거나 독경을 할때 사용하는 것인데 쉬고 있는 것인지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안정사 석조여래좌상으로 본래는 연화좌대에 안치된 석불상인데 안정사 주지가 방안에 안치하면서 금분까지 칠해서 원형이 다소 훼손 되었다. 대좌와 광배까지 없어지고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는 폐사되는데 그뒤 1973년부터 봉정사에서 모시게 되었단다. 건립시기는 통일신라 하대로 보고 있다. 원형 그대로 둬야 뭐가 뭔지 알수 있을 터인데 옛사진의 자료를 보면 금빛 찬란했으나 오히려 거의 벗겨진 지금보다 초라하게 느껴졌다.
고금당(古今堂), 원래는 불상을 모시는 부속 전각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나 지금은 요사체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복원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16년에 고쳐지은 사실이 있으나 처음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극락전(極樂殿)은 국보 제15호 이며 우리나라 목조 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면3칸 측면4칸의 맞배 지붕 주심포(기둥에서 지붕을 바로 받치는 뭐 그런 구조...)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물 양식을 띠고 있다. 1972년에 보수공사때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후 첫수리가 공민왕12년(1363)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건립연대는 12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은 이런 루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곳이 많다. 그래서 만세루에서 좀 떨어져서 내려다 보는 우리사는 세상의 일부분.
대웅전 계단을 내려와서 만세루로 내려가지 말고....아참, 대웅전!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보수 공사에서 사찰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상량문과 대웅전내 목조 불단에서 고려말경 제작된 묵서가 발견돼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바뀔것이 확실시 된다는데....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유명하지만 정작 남아 있는 역사는 전무 하다시피 하다고 한다. 참선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때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6,25때 인민군이 머무르면서 경전과 사찰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질렀다고 한다. 다행히 중수를 통해 발견되는 기록이 있어서 다행이랄수 있겠다. 아무튼, 오른쪽 바라보면 100m가량 떨어진 곳에 달마가 동쪽으로...를 찍은
영산암이 나온다. 만세루와는 달리 낮은 우화루의 공간을 머리 숙이고 들어가면
응진전이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영산암(靈山庵)은 봉정사의 부속 암자로 응진전, 염화실,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 관심당등 5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내판에는 "구체적인 건립 연대는 알수 없으나 여러 사료로 볼때 1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19세기 말이 오래전 과거도 아니고 과연 자료가 전무하다고 할수 있겠다. 전체적인 배치는 ㅁ자 형으로 폐쇄적인 느낌이 들수 있지만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한 기법과 조경 등에서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보조(普照 : 1158 ~ 1210) 국사의 선문답
국사에게는 누님이 있었다.
국사가 누님에게 항상 염불을 하라고 할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부처님같이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염불 공부를 해서 무엇하겠나?
설사 내가 도를 닦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까지 제도해 주는 아우가 있는데
나 하나쯤 좋은 곳으로 제도해 주지 않을려고?"
국사는 말로써는 누님을 제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어느 날 누님이 절에 오는 것을 미리 알고
국사의 방에 진수성찬을 가득 차려 놓았다.
이때 누님이 들어오자 국사는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누님 오셨습니까? 앉으십시오. 막 공양을 하려던 참입니다."
국사는 혼자서 음식을 맛있게 들고는 상을 물렸다.
전에 없던 일이 었다.
국사의 누님은 섭섭하고 노여운 감정이 일어나서
"자네가 오늘은 왜 이러나?"
"무슨 말슴입니까, 누님?"
누님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라니? 나는 그만 집으로 가야겠네."
"진지나 잡숫고 가셔야지 먼길을 그냥 가시면 시장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누님은 더욱 화가 난 목소리로,
"밥을 줄 생각이 있으면서 이제까지 있었나?
몇십리를 걸어온 사람을 보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한번 먹어 보라는 말도 없으니
그게 사람의 짓인가?"
그러자 국사는 정색을 하고 의아하듯이,
"아니 누님, 제가 이렇게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누님은 왜 배가 아니 부르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누님은 기가차다는 듯이,
"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단 말인가?"
"제가 도를 깨치면 누님도 제도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이 배부르면 누님도 배가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밥은 창자로 들어가고 염불은 마음으로 하며 정신은 극락을 가는 것이니
밥 먹고 배부른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그러자 비로소 국사는 낯을 풀며
"그렇습니다.
제가 음식을 먹어도 누님이 배부르지 않듯이
내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나의 영혼은 극락에 가도 누님은 갈 수 없습니다.
누님이 극락에 가고 싶으면 누님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죽음도 대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극락도 대리 극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국사는 상좌를 시켜 누님의 점심상을 차려 오게 해놓고 말했다.
"누님, 이 동생이 제도할 것을 믿지 말고
당신의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시어 내생에 극락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그 날 이후로 국사의 누님은 지성으로 염불을 하며 수행하였다.
명옥대(鳴玉臺)는 퇴계가 후학 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현종 6년(1665)에 사림들이 건립한 누각 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 였으나 육사형(陸士衡)의 시에 나오는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 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라 이름을 고쳤다 한다. 봉정사나 뒷산이나 내려 오는 길에는 잠시 쉬어감이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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