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운(柳尙運)에 대하여 | |
1636(인조 14)∼1707(숙종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유구(悠久), 호는 약재(約齋) 또는 누실(陋室). 아버지는 좌랑 성오(誠吾)이며, 어머니는 판서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로 기용되었다. 그뒤 지평과 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1680년(숙종 6) 대사간으로 특진되었다. 같은해 경신대출척 때 허견(許堅)의 추대로 역모에 가담한 복성군(福城君)을 탄핵하여 당쟁을 노론측에 유리하도록 이끌었다. 그뒤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1683년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다시 대사간을 지내고 두번째로 평안도관찰사로 내려갔다. 이해 다시 세력을 잡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이 되었는데 소론인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 등과 의기투합하여 정사를 처리하던 그는 당연히 소론에 소속되었다. 척신인 김석주(金錫胄)가 노론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정사를 전횡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여러 번 탄핵하는 소를 올려 그 기세를 꺾고자 하였다. 1685년 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1694년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인현왕후(仁顯王后)에 대한 불온한 글귀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된 장희재를 처형하자는 노론의 주장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장희재를 처형하게 되면 그 혐의가 세자의 생모인 희빈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앞으로의 혼란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남구만(南九萬)과 합세하여 장희재를 제주도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노론의 지탄을 받아 한때 삭직되어 성밖에서 대죄하기도 하였다. 그뒤 우참찬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696년 영의정에 올랐다. 1698년 노론의 배척을 받아 곤경에 처한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을 변호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그뒤 판중추부사로 복직되고, 1701년 무고의 옥사로 인하여 투옥된 장희재의 종 업동(業同)을 죽이지 않고 유배 정도로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장희빈이 연좌되었다. 세자의 생모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은 종사의 장래를 위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일임을 계속 주장하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아 남구만과 함께 파직을 당하였다. 이듬해 충청도 직산에 부처(付處)되었다가 1704년 석방되어 돌아왔다. 1704년 판중추부사에 다시 복귀하였다. 글을 잘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아직도 여러 곳에 금석문자가 남아 있다. 나주의 죽봉사(竹峰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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