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보고싶은 여행지

[스크랩] 제천 자양영당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8. 1. 12.

 

충주에서 박달제를 넘으면 오른쪽에 자양영당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접어들면 잠시뒤에 나타나는 깨끗한 제천 의병 전시관은 봉양읍 공전 장담리(長潭里)에서 제천의병이 창의한지 꼭 100년이 되는 1995년을 맞아 의병정신을 계승하고 국난극복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시에서는 자양영당(紫陽影堂) 성역화 사업을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하였는데 창의 106주년 제천 의병제 기간중인 2001년 10월 12일 개관하였다.

 

 

제천 의병전시관은 제천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전쟁을 수행한 제천의병들의 활약상을 영상, 모형등 각종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보여주고 있으며 조국을 위한 희생정신을 함양함과 함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무인으로 운영되지만 각종 센서와 카메라에 의하여 확실한 정보 제공을 하고 있었다. 의병들의 빛나는 승리도 있었지만 아픈 추억도 있으니....이강년의 제천전투 승리 이후 일제는 제천을 초토화 하는데 영국 데일리 메일의 기자 멕킨지는 1907년 조선의 비극이란 당시의 글에서 현 중앙공원인 아사봉에서 펄럭이는 일장기 아래 한달전까지 번화했던 거리가 잿더미로 변했으며 완전한 벽하나, 기둥하나, 된장 항아리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지도에서 싹 지워버린 폐허의 제천시를 처참하게 전하고 있다. 마치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에서 서상렬(1854~1896)이 안동에 들어가 영남지역과 연합의진을 구축하고 1896년 함창 태봉(台峰)의 일본병참 공격으로 역풍을 맞아 예천의 일부와 목표인 안동의 안기동에서 법흥동 일대가 불바다가 된 사태와 비슷한 풍경이 떠오른다. 소백산을 사이에 두고 특히 안동으로 들어온 이유는 퇴계라는 학맥이 확고한 결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퇴계 종택은 당시에 불태워지고 제천시가 피해를 본 그 무렵에도 신돌석 장군을 도운 이유로 또 다시 불태워진다. 전시관을 돌아보면서 마음속에서 양쪽의 화가 동시에 일어 하나가 되니 이곳인지 그곳인지 마구 헷갈린다.  

 

 

의병전시관은 어릴적부터 교과서로 낯익은 모습들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정신이 번쩍들도록 부릅뜬 눈으로 맞이 하는데 남산전투 디오라마, 각종 유품, 국내외의 활동상, 의병장 유인석이 사용했던 지도, 여러 의병장에 관한 다양한 자료등으로 아주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된 자양금(紫陽琴)은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 1832~1893)가 연주하던 칠현의 거문고로서 1800년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이다.  

 

 

왼쪽의 자양영당 등의 기념물과 오른쪽의 성재 유중교 선생의 거택. 유중교 선생의 거택은 77세 되신 할머니가 현재의 주인이신데 그분을 끝으로 제천시로 기증이 되어 운영할 계획이라고 오른쪽 방안에서 인기척에 나오신 관계자께서 설명해 주신다. 특히 그분은 이곳이 명당중의 명당이라고 소개한다.  

 

 

자양서사(紫陽書社)는 유학자인 유중교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고종 26년(1889)에 세운 서당(書堂)이다. 그는 한말의 사회적 동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유학의 학문적 심화와 체계적 정립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서(四書)와 서경, 시경등에 독자적인 주석을 하고 예제에 관해서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의례 문제에 관해 논의를 전개하였다. 양평의 큰 선비였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의 수제자인 유중교가 장담에 서사를 열자 위정척사를 신봉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다. 유중교의 뒤를 이어 위정척사의 영수가 된 이가 바로 유인석이다.

 

 

자양영당(紫陽影堂)은 습제 이소응과 화서학파 유림들에 의해 1907년에 건립 되었다. 주자, 우암 송시열, 화서 이항로, 성재 유중교의 영정을 모셨는데 후에 의암 유인석, 습재 이소응의 영정을 추봉하고 매년 후손과 유림들이 모여 춘,추향제를 음력 3월 20일과 9월 20일에 각각 지내고 있다. 특히 장판각에는 충북 유형 문화재 제37호인 조선말의 성리학자 중암 김평묵(重庵 金平默 1819~1891)과 성재 유중교가 송(宋), 원(元)대의 사적과 고려의 사적을 합편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이 있다. 이 판목을 의암 유인석의 주도 아래 고종 43년(1906) 춘천 가정리 가정서사(柯亭書社)에 간역소(刊役所)를 차리고 판각을 시작하여 1907년 5월에 완료한 것이다. 전체 2,620면 중 양면판각 2,450면, 단면판각 137면, 결면 33면이다.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 1842~1915)의 거택은 전시관 오른쪽 마을속에 있는데 대문이 잠겨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담이 조금 낮아서 안쪽이 조금 들여다 보인다.

 

 

고종 32년(1895) 을미의병 당시 의암 유인석 선생께서 모친상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유림들과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자양서사에서 논의 하였다.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 하는 것

거지수구(去之守舊):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道脈)을 계승하는 것

자정치명(自靖致命): 조용히 자결하는 것

 

♪ 짚시의 바이올린
출처 : 빗방울때리기
글쓴이 : 빗방울때리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