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양목장기알
특징은 宮이 文字 武字 로 표기됨
애기놀이개 은파란 자물통 안경집 방울
장기판
일본장기판
생육
주 기 쌍육 : 주사위를 던져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악삭, 십이기, 육채라고도 한다. 주사위가 모두 5이 나와야 이길 확률이 높으므로 `쌍육`이라 한다. 쌍육판에 흑백의 돌 각각 12개를 형식에 따라 벌여 놓고, 2개의 주사위를 죽통에 넣고 흔들어서 빼내 그 나온 수 만큼 돌을 전진시켜 적진에 먼저 들어가면 승리한다. 대개 사대부등 유식층의 남녀간에 행해진 놀이로, 특히 중류이상 부녀자들이 즐긴 놀이
바둑판 과 알
19줄보다 17줄이 더 재미있을 수도"
우선 19줄이 17줄보다 반드시 더 재미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바둑, 장기 등 여러 가지 게임에 관한 인공지능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시즈오카 대학의 이이다(飯田) 교수는 19줄보다 17줄이 더 재미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3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17줄 티베트 돌바둑판. |
이것은 19줄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대략 361!/4(패, 후절수 등과 같이 이미 둔 곳에 돌을 들어내고 다시 둘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함) 정도로 본다. 이것을 계산하면 10의 700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된다. 17줄의 경우도 289!/4가 되는데 이것도 만만한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4로 나누는 이유는 바둑판은 상하좌우 대칭의 구조로 되어 있어 4면으로 나뉘어 지며 각 면의 착점은 동일한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엄청난 경우의 수 때문에 인간에 필적할 수 있는 컴퓨터 대국 프로그램의 개발은 거의 불가능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적으로 현재까지 개발된 대국 프로그램 중 가장 강한 것이 10급 정도의 기력을 갖고 있다고 최일호 교수는 설명했다.
한편 체스의 경우는 상대적인 경우의 수가 적어서 컴퓨터 디프블루II(Deep blue)가 1997년 1500년 체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던 러시아의 게리 카스파로프를 6전 2승 3무 1패로 물리쳤다. 공식 경기에서 로봇이 인간을 처음으로 패배시켰는데 그 대상이 세계적인 천재라는 체스챔피언이라는 점에서 세계가 경악했다.
물론 딥 블루의 승리는 딥 블루의 프로그램을 설계한 프로그래머에게 공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정확한 지적이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보다 순간적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산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만들어 준 것은 체스에 대해 이해가 높은 프로그래머라는 뜻이다. 즉 프로그래머는 카스파로프와 직접 대결하여 체스 경기를 이길 수는 없지만 프로그래머가 입력시킨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딥 블루가 저장된 정보에서 불러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카스파로프가 패배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바둑판이 17줄에서 19줄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는 가설의 또 다른 문제점은 17줄보다 19줄을 그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9줄에서 17줄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단순한데 반하여 19줄을 만들려면 적어도 17줄 바둑판을 먼저 그리고 그것을 크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즉 재미 면이나 제작 면에서 힘든 19줄로 변형될 이유가 크지 않다는 지적으로 게임론의 측면 즉 19줄이 17줄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규모가 크게 되었다는 설명이 궁색해진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17줄에서 19줄로 변경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고 믿는다.
정창원에 보관된 바둑판, 한국에서 7세기경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며 테두리가 없다. |
일본의 안도(安藤如意) 교수는 17줄에서 19줄로 변한 것은 중국 당나라의 달력개정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다. 또한 다니오카 이치로는 원칙적으로 수나라에 이미 19줄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19줄이 처음 나타났다는 설 자체는 부정되지만 당나라와 수나라의 개국 연대상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둑판이 점이나 달력으로 사용되어 졌다는 설명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감한다. 중국의 고전인 『현현기경』에는 1년은 360일(바둑판은 19X19에서 천원을 빼면 360이 됨)이고 바둑판의 9개의 성(星)은 구요(九曜), 4개의 방향은 동서남북을 나타내고 4개의 귀는 사계절을 표현한다고 설명된다. 이런 설명은 바둑판을 점으로 사용했다는 것과도 연결되어 기원전 11세기 주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설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즉 수나라 또는 당나라로 확정짓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17줄과 19줄이 수나라와 당나라 때 동시에 발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설명도 있다.
다니오카 이치로는 대략 춘추전국시대가 끝나는 수나라 시대에 점을 담당하는 관리가 바둑판은 17줄보다 19줄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설명하여 19줄로 변경되었다고 가정했다.
한편 7세기경 한국에서 전해졌다고 알려진 일본의 정창원에 보관된 19줄의 바둑판에는 테두리가 없다. 즉 그려져는 있으나 이 선 위에 무리를 해도 돌을 올려놓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는 17줄로 바둑이 두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달력이나 점의 목적으로 테두리 부분을 포함하니까 자동적으로 19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바둑의 기원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천체관측설’이다.
농경(農耕)사회였던 고대에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황하유역에는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선사시대 때부터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도구가 발전되어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천체관측설’에 오청원 기성도 다음과 같이 동조했다.
바둑은 당초부터 천문학을 연구하는 도구로 태어났고 요임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임금이 부족한 아들 단주에게 바둑을 가르친 것은 바둑을 공부하면 천문학을 연구하는 역(易)이나 제례에 관한 교양을 터득할 수 있다는 의미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여 아들에게 제정(祭政) 중에서 제(祭) 쪽을 맡아 일하고 정치에는 손을 떼라는 뜻을 함축한다.
바둑을 한자로 기(碁) 또는 혁(奕)이라고 쓰는데 혁(奕)ㆍ역(易)ㆍ의(醫)는 중국발음으로 '이'라고 읽으며 력(曆)은 '리'라고 발음하니 비슷하게 닮았다는 점도 이 가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먼 옛날 중국의 통치개념이 제정일치가 기본이었기 때문에 역이나 천문이나 천명, 즉 신의 명령이나 암시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 오청원 기성의 생각이다.
한편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돌바둑판은 20세기 말 티베트 왕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약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티베트 바둑은 왕족과 승려들이 주로 두었는데 17줄이다. 지금까지는 1952년 중국 하북성 망도에서 출토된 17줄 돌 바둑판(후한시대 서기 182년)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 배치도, 네 군데 귀와 변, 그리고 중앙 한 복판에 17의 돌을 미리 놓고 백1, 흑2, 백3, 흑4로 바둑이 시작된다. |
일반적으로 바둑은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 일본 등으로 퍼졌지만 현대바둑의 틀은 일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한다. 일본 막부(幕府)시대에 바둑은 국기(國技)로 적극 지원을 받으면서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바둑을 업(業)으로 삼는 기사(棋士)제도와 본인방(本因坊)등의 바둑가문이 생기고, 이들에 의해 룰이 정비되며 각종 이론, 정석이 태어나는 등 비로소 근대경기로서의 틀과 체계가 세워졌다.
20세기에 이르러 가문세습제도 대신 협회(일본기원)와 프로제도가 탄생하고, 신문사들이 기전의 스폰서로 나섰다. 일본의 뒤를 이어 뒤늦게 중국, 한국, 대만 등지에서도 프로 바둑제도를 도입하고 다양한 국제기전을 창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바둑을 권장하자 오늘날과 같은 바둑 붐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바둑은 한국말>
'바둑'이란 말은 한자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고유한 우리말로 추정한다. 해방 전까지는 '바독' 또는 '바돌'이라 불렀으며 일부지방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독'이나 '돌'자는 한자의 돌석(石)의 뜻을 표현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단원은 네티즌 ‘뿌리(ko5135)'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일찍이 인도네시아어인 '바투(Batu)'를 바둑의 원말로 보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바둑서지학자인 안영이는 우리의 순장바둑이 티베트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바둑을 뜻하는 초기 산스크트어 'Badh(바드)'가 '바독-바둑'으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바둑의 어원을 ‘밭(田)'과 ’돌'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역에 따라 돌(石)을 ‘독'(경상ㆍ전라ㆍ제주ㆍ충청도 등 남부지방)이라고 하고 바둑을 ’바돌'이라고 하는 것을 감안할 때 바독의 ‘독'이 석(石)을 의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밭독'으로부터 ‘ㅌ’ 받침이 떨어져나가 ‘바독'이 되고 다시 ‘독'이 ‘둑'으로 변하여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밭'과 ’독'이 결합하여 지시하는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밭독'설에 근거한다면, ‘밭'은 넓은 바둑판을 지칭할 수도 있고 361개의 네모난 공간을 가리 킬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역사언어’라는 음운학적 추출 방법론(PEM, Phonological Extraction Methodology)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한자, 한글 등 각종 어휘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권명수는 바둑을 ‘바닥에 줄로 그은 집을, 서로 뺏으려고, 차례로 돌을 두어, 그 에워 싼 집의 크기로, 겨루는 것’이 줄은 말이라고 설명한다. 즉, ‘뺏으려+(돌을) 두어+겨루는 것’? ‘ㅂ+ㄷ+ㄱ’? ‘바+둑’이라는 뜻이다.
중국 당(唐)나라 때 기사들의 실전에서 나타난 포석장면, 흑.백이 대각선으로 네 귀의 화점에 미리 돌을 놓고 백의 선수로써 바둑이 시작된다. |
여하튼 우리나라는 일본과 중국과는 달리 고대부터 순장바둑을 두었다. 순장바둑은 17개의 지점에 바둑돌을 미리 배치하고 시작 했는데, 이를 일컫는 배자(排子)가 바둑이라는 명칭의 어원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화점상의 배자, 즉 ‘백돌-배독-바독-바둑'으로 변음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다. 순장바둑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한다.
바둑을 한자로는 기(棋), 기(碁), 혁(奕), 위기(圍棋)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기(碁)'가 주로 사용되고 중국에서는 ‘기(棋)' 자를 쓰는 것이 통례처럼 되어 있다. ‘혁'이라는 글자는 공자의 글에서 나타나는데 혁의 뜻은 '바둑 두는 것', 즉 위기와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위기(圍棋)'는 ‘바둑을 둔다'는 행위를 뜻하는 중국용어이다.
일반적으로 바둑의 한반도 전래설에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과 한사군설(漢四郡說) 두 가지가 있다고 권경언 六단은 적었다.
기자동래설이란 『한서지리지』에 근거하는 설로서 기원전 12세기 무렵 주(周)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紂)왕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뒤 현인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책봉하여 단군조선의 뒤를 잇게 했는데 당시 기자가 부하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올 때 학술ㆍ기예 등 각 분야에 훌륭한 인재들이 기자를 따라와 조선에 문화를 전파했으며 그 중에 바둑 두는 사람이 있어 한반도에 바둑을 전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사군설이란 중국 한나라 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당시 조선을 통치하던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을 멸망시키고 위씨조선의 옛 땅에 낙랑ㆍ진번ㆍ임둔ㆍ현도 등 4개의 군현을 설치했는데 그 시절 한인 관리와 상인들이 내왕하면서 바둑이 전해졌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기자동래설은 한족(漢族)이 한사군을 지배할 당시 그들의 통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억지로 조작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고 위만에게 멸망당한 기자조선의 마지막 임금 준왕의 성이 한(韓)씨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 씨 정권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기자를 참칭(僭稱)했다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으므로 기자조선시대에 바둑이 전래되었다는 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권 6단은 적었다. 또한 한사군시대의 바둑전래설도 확실한 문헌의 근거는 없다는 지적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삼국시대에 이미 바둑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북사(北史)』 <백제전>, 『주서(周書)』 <백제전>, 『수서(隋書)』 <동이전> 등에는 「백제의 풍속에 투호ㆍ저포 등 여러 가지 놀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바둑을 가장 숭상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구당서(舊唐書)』 <고려전>, 『신당서(新唐書)』<고려전> 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바둑과 투호놀이를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신당서』 <신라전>과 『구당서』 <신라전>에는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두므로 바둑을 잘 두는 인물 솔부병조참군 양계응(楊季鷹)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조(蓋鹵王條)에 나오는 승려 도림(道琳)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려고 하였으나, 막강한 백제가 버티고 있으므로, 고구려에서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장수왕에게 첩자가 되기를 자청하여 백제에 거짓 망명을 하였다.
백제에 와서 개로왕과 바둑을 두면서 친하게 되자 도림은 개로왕에게 진언하여 왕릉ㆍ성곽 등을 개수하도록 하고, 그 결과 국고를 탕진시켜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고구려는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치자, 패배한 개로왕은 피살되고 태자 문주(文周)는 몇 사람의 심복과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도망가 임시 도읍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바둑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신라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기 전 왕자로 있을 때 신충(信忠)과 함께 대궐 안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 왕자는 신충이 어질고 현명한 데 마음이 끌려 ‘후일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으면 저 잣나무가 증언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가시간에 담배 피고 바둑 두는 기생, 고려 시대의 이규보는 평양 기생 진주(眞珠)가 바둑이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한판 두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를 쓸 정도로 고대에는 남녀가 모두 바둑을 뒀다. |
그 후 성덕왕 36년에 부왕이 승하하자 효성왕이 왕위에 올랐고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신충이 빠져 있었다. 이에 신충은 못내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잣나무에 글귀를 써서 붙였다. 그러자 잣나무가 말라죽고 말았다. 효성왕은 이상히 여겨 잣나무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에서 신충의 글이 발견되었다. 효성왕은 놀라 ‘내가 국사에 골몰하다가 그만 그대와의 언약을 잊을 뻔했구나'하면서 신충을 불러 작록을 내리고 그에게 국사를 맡겼더니 잣나무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여성들도 바둑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문호 이규보(李奎報)는 평양 기생 진주(眞珠)가 바둑이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한판 두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를 써서 보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다. 그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자주 어울려 바둑을 두었는데, 당대 제일가는 고수로 알려졌다. 또한 이순신 장군도 평소 바둑을 즐겼다는 것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바둑 두었다는 말이 4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매우 바둑을 즐겼는데, 김만수라는 사람이 바둑을 잘 둔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함께 바둑을 둔 결과 실력이 우수하자 대원군은 김만수를 의성(義城) 고을의 사또로까지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최근 바둑의 ‘중국 기원설(起源說)'에 대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바둑사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바둑이 중국에서 발상했다는 것은, 지역적으로 한반도 이북의 땅이면 무조건 중국이라고 여기는 데서 비롯된 오류로 보인다. 바둑이 요ㆍ순(堯舜)시대에 생겼다는 기록을 인정하더라도 그때에 무슨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가. (중략) 오늘날 만주로 불리는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른바 ‘동이족(東夷族)'이었고 그들은 후에 고구려를 세웠고 우리 민족의 원류가 되었다.
따라서 바둑은 ‘지역적 산물'이 아니라 '종족적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게다가 지역적으로 보더라도 한반도 이북의 만주 지역은 우리의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땅이었다. 그렇다고 바둑이 우리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우리가 강조하는 바는, 바둑은 그저 ‘동이족'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사실에 접근하는 태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여 보다 명쾌한 결론을 제시할 것이므로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한국 바둑의 뿌리 순장바둑>
기본적으로 바둑이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한ㆍ중ㆍ일 동양3국 각 나라마다 바둑 두는 식이 과거에는 다소 달랐다.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은 네 군데 귀와 변, 그리고 중앙 한 복판에 돌을 미리 놓고 바둑을 시작한다. 따라서 순장바둑에는 소목이니 외목, 고목 따위의 착점이 있을 수 없고 포석이 없으며 흑, 백의 돌이 서로 끼어져 놓여 있어서 출발부터 곧바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중국 당(唐)나라 때 기사들의 기보를 보면 흑, 백이 대각선으로 네 귀의 화점에 미리 돌을 놓고 백의 선수로써 바둑이 시작된다. 이를 보면 과거에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삼국이 똑같이 중국식 바둑을 두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에서는 배자(排子 : 미리 놓고 두는 돌)가 많아지고 일본에서는 배자가 사라지는 쪽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순장바둑이 우리나라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두어졌다는 것으로는 앞에서 설명한 일본의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바둑판으로도 알 수 있다.
서기730년경 일본의 성무제(聖武帝)가 애용했다는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에는 백제의 의자왕이 보냈다는 명문이 있다. 모양은 우리의 재래식 네발 달린 주안상과 비슷한데 반면은 자주색 박달나무판이고 가로 세로 눈금은 상아를 가늘게 박았으며 정교한 꽃술무늬 화점(花點) 17개가 박혀 있다. 옆면에는 낙타, 사슴, 공작새 등 각종 동물과 꽃을 상아로 조각하여 박았고 바둑알을 넣는 서랍이 대각으로 달려 있어 정교하고도 화려한 공예예술의 진귀품으로 바둑알은 300개이다.
순장바둑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은 순장이란 단어조차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권경언 6단의 글에서 참조한다.
한국기단 초창기의 노국수이자 한학자인 신호열(辛鎬烈)은 우리나라의 바둑 명칭은 원래 화점바둑이라고 설명했다. 바둑돌을 놓는 점에 꽃무늬로 표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순장바둑이란 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바둑이 들어오면서 조선바둑과 일본바둑을 구분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라고 적었다. 그러므로 순장바둑이란 그냥 우리말이며 한자로 표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 만약 꼭 한자로 쓴다면 순수한 어른스런 점을 놓고 둔다는 의미에서 순장(純丈)이 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설명했다.
한학자 홍진표는 순장(巡將)으로 쓰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판 위에 17의 배자를 놓은 모양이 요소마다 장수를 배치한 것과 흡사하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말이라는 것이다. 바둑은 예로부터 용병에 비유되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진을 치고, 공격하고, 수비하고, 쫓아가고, 도망치고, 죽이고, 살리고, 하는 바둑 용어들이 모두 전쟁용어이므로 순장이라는 말이 바둑에서 사용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는 설명이다.
권명수는 순장이라는 한자의 뜻을 보면 ‘서로 돌아가면서 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바둑’에서 그렇게 안 두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그는 순장(巡將, 쒼+쟝)이란, ‘처음에, 맞서게+쌓고 두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반면에 한국 바둑의 개척자로 불리는 원로기사 조남철 9단은 자서전에서 순장(順丈)바둑이라고 표기했다. 이것은 순번대로 장(丈)점을 놓고 둔다는 의미이다.
한편 1933년 11월, 조선기원에 나오는 몇몇 국수급 기사들이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해 『신정기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순장바둑의 맞바둑 기보와 접바둑 기보, 그리고 순장바둑 정석 등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순장이란 말은 없고 장점(將點)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반면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순장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바둑 서지학자인 안영이씨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연화문바둑판을 공개하여 사실이 아님을 확인했다. 17개의 화점과 그중에서도 천원의 연꽃무늬가 크게 그려졌으며 바둑판을 뒤집으면 역시 중앙에도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때 고려시대에도 순장바둑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또한 구한말 고종 때 금부도사와 중추원의관 등을 지낸 정환직의 기국문에는 ‘순장혹흑점겸백권이흑마(巡將或黑點兼白圈以黑摩, 순장은 흑점, 또는 백의 세력권에도 흑기를 꽂았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장이라는 말은 적어도 일제강점기에 생긴 말은 아닌 것이 확인된다.
반면에 문용직 五단은 순장바둑이 조선 성리학과도 맥이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순장의 어원은 순랏길로 궁성 수비를 하는 종3품 이상의 벼슬아치로 볼 수 있다. 논어에 나오듯이 천원을 북극성으로 볼 때 이를 둘러싸 지키는 순장바둑의 형태는 조선 성리학의 세계관과 맥이 맞닿아있다고 여겨진다."
한편 순장이란 단어를 어떻게 적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권경언 6단은 순장바둑의 바둑이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순장은 한문의 어조가 분명한 것으로 보이므로 한자를 사용할 때는 순장(巡將)이 옳다고 설명했다.
정수현 교수는 순장바둑의 특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장바둑은 바둑판 위에 미리 16점의 돌을 깔아놓고 두는 특이한 방식이다. 반상의 요소를 흑과 백이 똑같이 점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미리 포석을 해 놓고 시작하는 식이다. 그런데 돌의 배치가 각자의 진형 사이사이에 상대방의 돌이 들어가 있어 전투적인 형상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순장바둑은 처음부터 전투로 돌입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 때문에 이론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으며,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적 처리가 중요하다.’ (계속)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밤윷
윷은 박달나무나 붉은 통싸리나무로 만드는데 '장작윷(가락윷)'과 '밤윷'의 2가지가 있고, 관서(關西)·관북(關北) 지방에서는 '콩윷(팥윷)'이라 하여 검정콩이나 팥알 2개를 쪼개어 4개로 만들어 노는 것도 있다. 장작윷은 지름 3cm쯤 되는 나무를 길이 15cm 정도로 잘라 이것을 둘로 쪼개서 4개로 만든 것이며, 밤윷은 작은 밤알만하게(길이 1.8cm, 두께 1cm 가량) 만든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작윷은 경기도 지방의 것이다. 경상도나 전라도의 남도 지방은 밤윷을 즐긴다. 밤윷은 통상 간장종지 같은 것에 넣어 손바닥으로 덮어 쥐고 흔든 다음 속에 든 밤윷만 땅바닥에 뿌려 던진다. 콩윷은 대개 토시 한 짝을 세워놓고 오른손에 콩알(팥알)을 쥐고 흔들어 토시 속으로 던져 넣는데, 토시가 없을 때는 종이로 토시 모양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장작윷은 부녀자들의 경우 주로 안방에서 요나 담요 등을 깔고 놀며, 남자들은 사랑방이나 마당 또는 큰길가에서 가마니나 멍석을 깔고 높이 1m 정도로 던지면서 즐긴다. 던진 윷쪽의 하나(지방에 따라 2개)가 멍석 밖으로 나가면 그 회는 무효로 한다.
정해진 규칙을 조금 변형하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말을 여섯 마리로 한다든지, 윷판의 모양을 바꿔 지름길과 돌아가는 길, 함정 등을 만들어 놓는 등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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