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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古文書)

화서 이항로선생 간찰 유중교선생시고 제례통고등 의병장 자료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8. 7. 9.

 유중교선생시고

1832(순조 32)~1893(고종 30).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치정(致政:穉程), 호는 성재(省齋). 아버지는 진사 조(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김평묵(金平默)과 함께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52년(철종 3) 이항로의 명으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 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수했다. 1876년에는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81년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소론(疏論)이 일어나자 김평묵과 함께 춘추의리론(春秋義理論)을 기반으로 구법보수(舊法保守)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했다. 1882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가평의 옥계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초·중년에는 스승의 학설을 따랐으나, 만년에 들어서 스승의 심설(心說)에 반대했다. 즉 심을 기(氣)로 보아, 심을 이(理)로 본 이항로와 김평묵의 설을 비판했다. 1886년 〈논조보화서선생심설 論調補華西先生心說〉을 김평묵에게 보냄으로써 화서학파 내부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항로가 명덕(明德)을 이로써 설명한 점은 마땅하다. 그러나 명덕이 이에 속하므로 심을 이라고 하여 성과 동일시한 점은 끝내 타당하지 못하다. 심과 명덕의 차이는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심에 비록 이로써 말할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본래의 명위(名位)로 말하자면 심은 형이하의 물체이다. 다만 그에 갖추어진 이인 성·명덕이 형이상자일 뿐으로, 바로 물(物)과 칙(則)의 차이와 같다. 심에 대한 이항로의 설명은 물·칙의 차이를 분명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오희상(吳熙常)의 심설을 추존하여 정론이라고 하여 대체적인 주장이 낙론(洛論)의 학자들과 합치되나, 오직 명덕이 이에 속한다는 설이 낙론과 다를 뿐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김평묵·유기일(柳基一)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유중악(柳重岳)·유인석(柳麟錫)·노정섭(盧正燮)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 논변은 1888년 그가 "선사의 심설은 이로써 심을 단정지은 것이 그 진면목이다"라고 하고 "선사가 물·칙의 구분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는 말은 신명처를 모두 이로 보았기 때문에 이처럼 의심하여 보충하려던 것이다"라는 요지의 〈화서선생심설정안 華西先生心說正案〉을 김평묵에게 보내 일단 중단되었으나, 임종시 이 답변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이 논변은 일단락되지 못했다. 한편 태극(太極)에 관하여는 태극이 무위(無爲)하면서 유위(有爲)의 지극한 것이 되고 무형(無形)하지만 유형(有形)의 근본이 된다고 하여 태극에 양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氣)에 대해서 천지가 아직 성립되기 전의 '일원(一元)의 기(氣)'란 시원(始原)의 기이며, 기도 영원한 보편자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보았다.
그는 한말의 사회적 동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유학의 학문적 심화와 체계적 정립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서(四書)와 〈서경〉·〈시경〉 등에 독자적인 주석을 하고, 예제(禮制)에 관해서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의례(儀禮) 문제에 관해 논의를 전개했다. 이밖에 〈현가궤범 絃歌軌範〉을 저술하여 악률(樂律)을 정리·해명하고 스스로 악곡(樂曲)을 지음으로써 예악(禮樂)이 사회 교화에 미치는 기능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저서로 〈성재문집〉·〈태극도설대지〉·〈소대학설〉·〈삼강오상설〉·〈삼서연의 三書衍義〉·〈하도낙서설 河圖洛書說〉·〈역설 易說〉·〈인물성동이변 人物性同異辨〉 등이 있다.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고산 삼현서원(三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중교선생 제례통고

 화서 심의도설

 습재선생의  학산수록

조선 말기 의병장. 이명(異名)은 의신(宜愼). 호는 습재(習齋). 본관은 전주(全州). 강원도 춘천(春川) 출신.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춘천에서는 96년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와 농민 1000여 명이 모여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곧 격문을 지어 전국에 보내 민심을 격동시키고 함께 거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조인승(曺寅承)을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보냈는데 의병에게 잡혀 참형을 당했다. 이 일을 시발로 춘천 의병대의 기세는 등등했지만 그 세력이 선비 중심으로 이루어진 봉기여서 전략·전술에는 미숙했다. 그리하여 신우균(申羽均)·김구현(金龜鉉)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밀려 제천(堤川) 유인석(柳麟錫) 부대로 입진(入陣)했다. 그 뒤 유인석을 따라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 죽었다. 저서에 《습재연보》 《습재선생문집》이 있다. 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항로선생의 화서아언 3책

 이항로선생의 화서아언 3책 필사본

 이항로선생의 화서아언 3책  목판본

 이항로선생의  간찰

이항로 (李恒老 ; 1792~1868)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 자는 이술(而述)이며 호는 화서(華西)이다. 초명은 광로(光老)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양근(楊根) 출생으로서 아버지는 회장(晦章)이다. 3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不正)이 있음을 알고 단념하였다.

  1840년(헌종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徽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獄死) 때 체포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고, 18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그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거쳐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복궁(景福宮) 중건의 중지와 취렴(聚斂)의 시정을 촉구하는 등 최초로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그는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더불어 19세기 주리철학(主理哲學)의 3대가(三大家) 가운데 하나로,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맹자의 의리지사(義理之辭)·벽이단(闢異端), 주자의 노불변척(老佛辨斥)과 〈통감강목 通鑑綱目〉에 나타나 있는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대의(大義)를 의리정신의 맥락으로 삼아, 주자와 송시열을 존숭했다. 우주론에 있어서 〈주역〉의 계사전(繫辭傳)과 주돈이(周敦)의 〈태극도설 太極圖說〉에 근거하여 우주를 하나의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보아 자연적 생성법칙으로서의 존재원리와 함께 도덕적 주재원리를 자신의 우주론 속에 포괄시켰다. 그는 태극에 대해서 그것이 음양(陰陽)·동정(動靜)의 주체로서 작용하는 주재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존재원리로만 이해한다면 현허(玄虛)와 무용(無用)의 개념으로 떨어져 버리게 됨을 지적했다. 이와 같이 태극의 유행(流行)에서 기(氣)를 주재하는 능동성을 강조한 그의 태극론은 그가 주장하는 생성철학(生成哲學)의 논리적 기반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기론에 있어서 '이가 기보다 앞선다'(理先氣後), '이는 존귀하고 기는 비천하다'(理尊氣卑), '이가 주인이고 기는 부려진다'(理主氣役)는 등의 주장을 통해 만물존재의 두 요소로서 설명되는 이와 기를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인식의 태도는 이는 순선(純善)하지만 기는 불선(不善)을 겸하고 있으므로 이를 존중한다는 강한 가치관의 토대 위에 구축된 것이었다. 그는 이를 존재원리로서의 소이연(所以然)과 함께 도덕법칙으로서의 소당연(所當然)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에 담긴 소당연의 이가 유행을 통하여 기를 주재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보아 이체기용설(理體氣用說)을 부정하고 이는 체용(體用)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기의 선후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이선(理先)과 기선(氣先)의 양면을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는 객관적 태도를 전제하면서도 이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즉 이기의 존재는 항상 동시성을 갖고 있지만 가치론의 입장에서 이가 기의 원리가 되며, 근원적 실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인식의 주체인 '심'(心)에 대해서도 심을 이로 보는 입장과 기로 규정하는 입장에 모두 반대하고, 이기를 동시에 포함한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를 중요시하는 그의 주리론은 외침의 위기가 고조되고, 기존의 가치관이 크게 동요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순선을 지향하고 대의를 실천한다는 존왕양이의 춘추대의에 기초한 위정척사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바탕하여 그는 병인양요 당시 상소를 통해 "서양 적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쪽 사람의 말이요, 그들과 화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적 쪽 사람의 말이다"라고 하여 척화론-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는 한편, "적이 침범해오면 의병과 관군이 막아내어 왕실을 보호하고, 적이 물러가면 강상의 윤리를 밝혀 사교를 소멸시켜야 한다"라는 척사론(斥邪論)을 개진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협의되는 동안 일본과 서양을 마찬가지의 침략자로 규정한 김평묵과 홍재구(洪在龜) 등의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으로, 무력에 의한 강화가 불평등하고, 적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침략자이며, 우리의 도덕규범을 그르치는 금수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조약체결을 해서는 안 된다는 최익현의 〈지부복궐척화의소 持斧伏闕斥和議疏〉로,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학살을 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의리정신에 따른 항의와 순도의 신념에 바탕하여 일어난 유인석(柳麟錫) 등의 의병항쟁으로 발전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이 있으며, 편저로는 〈화동역사합편강목 華東歷史合編綱目〉·〈벽계아언 檗溪雅言〉·〈문인어록 門人語錄〉·〈주역석의 周易釋義〉·〈주자대전차의집보 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정운경선생간찰

1861(철종 12). 2. 19 충북 제천~1939. 2. 2.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화유(和有), 호는 송운(松雲).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각처에 통문을 보내고 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다. 1895년 명성황후가 학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柳麟錫)의 의병진에 참가했다. 1896년 1월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충주성을 점령하고 청풍(淸風)·평창(平昌)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을미의병). 같은 해 3월 전군장 겸 전군군사사(前軍將兼前軍軍事師)에 임명되어 충주·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유인석의 지시를 받고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파견되어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유인석이 의병진을 해산하고 간도로 망명한 이후 여러 차례 간도에 다녀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단양 일대에서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태세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원주진위대의 습격을 받고 영춘에서 체포되었다. 1905년 11월 평리원(平理院)의 재판에서 유배 15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황주(黃州)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