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대사헌·형조판서·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장유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선조실록》의 수정을 맡았다. 저서《택당집》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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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덕수(德水). 자 여고(汝固). 호 택당(澤堂). 시호 문정(文靖).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義州)에서 구치(拘置)되었으나 탈주하여 돌아왔다.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다. 저서에 《택당집(澤堂集)》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택풍당지>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병진년(1616, 광해군8) 1월 갑술일에 나는 여주(驪州)의 북쪽편에 자리 잡은 강구(康丘) 마을에 있었다. 이때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면서 여주 고을은 당인(黨人)의 화(禍)가 한창이어서 나도 두려워하여 여기를 떠나려고 하였다. 서울에 살면 어떨까 하고 점을 치니, 췌괘(萃卦)가 송괘(訟卦)로 변하는 불길(不吉)한 점괘가 나오고, 호남에 살면 어떨까 하고 점을 쳐도 불길하고, 영남에 살면 어떨까 하고 점을 쳐도 불길하여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처음에 지평은 땅이 메마른 데다 여주의 경내이기 때문에 점을 쳐보지 않다가 길하다는 점괘(占卦)를 얻고서야 비로소 여기에 살았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와서 작은 집을 짓고 편액을 하였는데, 당의 모양이 누(樓)와 같았다. 높이는 16척으로 가운데 한 칸은 방을 만들고, 기둥을 따라 중간 정도까지 흙을 쌓아 올려 온돌을 놓고 창과 벽을 두었다. 벽 밖으로 네 기둥을 넓혀서 난간을 두르고 판자를 깔아 난간을 만들었다. 높이는 온돌 높이에 비해 가로로는 반 정도, 길이로는 그 배가 되었으며, 아무것도 가로막힌 것이 없어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다.“갈 곳이 없구나.” 하고, 곧 지평(砥平)의 백아곡(白谷鵶)인 선영(先塋) 밑으로 점을 치니, 대과괘(大過卦)가 함괘(咸卦)로 변하는 것을 만났다.
[출처] 택당 이식의 택풍당|작성자 아따 난간 아래 동편은 땅이 낮고 질어서 샘물을 끌어다 네모진 못을 만들었고, 못 가운데의 조그마한 흙더미는 그대로 두고 거기에 버들을 심었다. 당(堂) 안은 꽉 차고 밖은 텅 비어 있으며, 못 가운데는 나무가 있으니, 다 택풍(澤風)의 상(象)이다. 방안의 벽 끝에는 64괘(卦)와 그 상사(象辭)를 나열했고, 남쪽 창 양쪽에는 대과괘(大過卦)의 상사(象辭) 8자를 크게 써 두었다. 집은 소박하고 간략하게 지어, 지붕은 나무 껍질을 깎아 덮었을 뿐이다. 백아곡은 만첩산중에 있고, 당은 또 백아(白鵶) 골짜기 안에 있어, 사방이 둘러싼 것이 마치 항아리 같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며 낮고 진 곳에는 능수버들이 많으나,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돌들이 없다. 그러나 골짜기에는 솟아 나오는 샘물이 많아서 샘물 소리가 들을 만하다. 동남 양쪽 언덕에는 선영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고 사모하곤 한다. 그래서 집 안에서 노래하고 술 마실 일이 있어도 감히 잔치를 벌여 한껏 즐길 수는 없다. 책 몇 권을 놓아두고서 마을 학동(學童) 몇 명을 모아 글을 읽다가, 지루하면 계곡에 나와 냇물을 따라 올라가 목욕하고 돌아온다. 처음 여기에 와서 산 때로부터 오늘까지 12년이 되었다. 그사이에 혹 나가서 벼슬하는 일도 있었으나 항상 왕래하며 머물러서 1년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러나 그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근심이 없다.’는 뜻에 대해서는 아직 거의 체득을 하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내가 중인(衆人)으로 돌아가고 신명(神明)을 버린 것일까? 이 뜻을 서술하여 나의 허물을 기록하고, 또 이를 후세 사람에게 보인다 [출처] 택당 이식의 택풍당|작성자 아따
음성기록역사관 소장 복사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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