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문서(古文書)

정철 許穆 權敦仁 厚源益熙 益勳閔鼎重閔維重金萬基金壽增 金壽恒 金壽興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9. 1. 18.

 

 

 

 해동고첩 17매 ( 海東古帖)

 

 

김익희(金益熙)에 대하여
1610(광해군 2)∼1656(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洲). 할아버지는 장생(長生), 아버지는 반(槃)이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정자에 등용되었다. 같은해 검열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635년 수찬·사서를 거쳐,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자로서 청나라와의 화평을 반대하며, 왕을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되었다.

1637년 교리·집의를 거쳐 1639년 이조좌랑이 되고, 1642년 사간이 되었다.

1653년 부제학으로서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 드릴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듬해 그의 주장으로 사학(四學)에 교수 각 1인을 겸교수라 일컫고 시종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1655년 대사성·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대제학이 되었다.

1708년(숙종 34) 손자 진옥(鎭玉)이 그의 글을 모아 《창주유고》를 간행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후원 [李厚源, 1598~1660]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김장생에게서 배웠다. 예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최명길의 주화론에 반대하고 효종의 북벌정책을 보필하는 등 반청론·북벌론에 깊이 참여하였다. 서인의 입장이었다.
본관 전주(全州)
우재(迂齋)
별칭 자 사심(士深), 시호 충정(忠貞)
활동분야 정치
본문

본관 전주(). 자 사심(). 호 우재(). 시호 충정(). 김장생()에게서 배웠다. 유생으로서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녹훈되고, 완남군()에 봉해졌다. 태인현감을 거쳐 정묘호란에는 총융사로 활동하였다. 수령을 몇 차례 더 역임한 후 1635년(인조 12)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이후 지평 ·승지 ·참판 ·관찰사 등 많은 관직을 역임하여 1655년(효종 6)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거친 끝에 1657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인조대의 고위 공신세력이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대개 비공신() 사류()들과 대립하였던 것에 비해, 공신으로서의 위세도 크지 못하였고 일반 사족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과거 급제 후 김상헌()의 천거를 받았고, 효종 초년에는 청나라에 빌붙어 권력을 휘두른 공신 권세가 김자점()을 위험을 무릅쓰고 배척하였으며, 김육() 등에 반대하여 송시열() ·송준길()을 적극적으로 끌어주었다. 이념적으로도 병자호란최명길()의 주화론에 극력 반대하고 효종의 북벌정책을 보필하는 등 반청론 ·북벌론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공신들이 대개 몰락한 효종 말년에도 정승에 오를 수 있었다. 붕당간의 대립에서는 서인의 입장을 지켰다. 향리인 경기 광주의 수곡서원()에 제향되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익훈 [金益勳, 1619~1689]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1680년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을 숙청하는 주동역할을 하고, 훈척의 세력으로서 송시열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유배되었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본관 광산
광남
별칭 자 무숙, 시호 충헌
본문

본관 광산. 자 무숙(). 호 광남(). 시호 충헌(). 장생()의 손자. 참판 반()의 아들. 음보로 등용되어 의금부도사() ·사복시첨정() ·수원부사 등을 거쳐, 1678년(숙종 4) 광주부윤()이 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을 일으켜 남인을 숙청하는 주동역할을 하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형조참판 ·어영대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훈척의 세력으로서 송시열()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1682년 김석주()와 함께 남인 허새() ·허영() ·유명견() 등에게 반역을 하도록 흉모를 꾸몄으나, 오히려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갈리는 원인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공신호를 빼앗기고 강계에 유배되었다.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정중 [閔鼎重, 1628~1692]
요약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 서인 계열. 이조 ·공조 ·호조 ·형조 판서를 역임했다. 남인 득세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좌의정이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유배되어 죽었다.《노봉문집》,《노봉연중설화》등이 있고, 글씨에 능했다.
본관 여흥
노봉
별칭 자 대수, 시호 문충
주요저서 《노봉문집》 《노봉연중설화》 《임진유문》
장흥 연곡서원 / 전남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전남기념물 제18호. 조선시대. 노봉 민정중을 기리기 위한 서원.
본문

본관 여흥(). 자 대수(). 호 노봉(). 시호 문충(). 관찰사 광훈()의 아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장원, 호남어사()를 지낸 뒤 대사헌을 거쳐 이조 ·공조 ·호조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675년 남인이 득세하자 서인으로서 장흥부()에 유배되었다가 1680년 풀려나 좌의정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벽동()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효종 묘정(), 양주()의 석실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노봉문집()》 《노봉연중설화()》 《임진유문()》이 있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유중 [閔維重, 1630~1687]
요약
조선 숙종의 장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숙종 때 호조판서가 되었다.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대공설을 지지했다.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노론에 속했다. 경서에 밝아 사림간에 명망이 높았다.
본관 여흥
둔촌
별칭 자 지숙, 시호 문정, 여양부원군
민유중선생 신도비 /
본문

본관 여흥(). 자 지숙(). 호 둔촌(). 시호 문정(). 인현왕후()의 아버지.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급제, 예문관을 거쳐, 1674년(숙종 즉위)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자의대비()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대공설()을 지지하였다. 1681년(숙종 7)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노론()에 속했으며, 경서()에 밝아 사림간에 명망이 높았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만기 (金萬基)   (1633년(인조11)~1687년(숙종1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으로 예학의 태두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생원 김익겸(金益兼)이다.
숙종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로서 송시열의 문인이다.
1652년(효종3)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설서가 된 후 수찬, 정언, 교리 등 청직을 역임하였다. 현종 초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設)을지지,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하는 남인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1671년(현종12) 딸이 세자빈이 되자 외척으로서 정치적 지위가 더욱 굳어져 서인의 핵심인물로 떠올랐으며,
1674년 병조 판서가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해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총융사를 겸하여 남인 정권에 대해 군사권으로써 견제하였다.
1680년(숙종6) 경신환국이 진행되는 속에 특지로 훈련대장이 되어 동요하는 군심을 안정시키고 허견(許堅)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 : 서석집(瑞石集)
참고문헌 : 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성 명】 김수증(金壽增)
【생몰년】 1624(인조 2)∼1701(숙종 27)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연지(延之), 곡운(谷雲)
【저서·작품】 《곡운집(谷雲集)》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학자

1624(인조 2)∼1701(숙종 2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으로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 성리학자로 1650년 생원시를 거쳐 1652년 세마(洗馬)가 되었다. 그 뒤
형조 정랑 · 공조 정랑을 거쳐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고, 1675년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당시 성천 부사의 직을 그만두고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남인이 몰락하고 소론이 집권하였으나 1689년 송시열과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죽음을 당한데 충격을 받고 벼슬하기를 사양하였다. 그후 1697년 12월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공조 참판을 제수받았다.
관직을 떠나 은둔하였을 때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으며, 더욱이 소강절(邵康節)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농수정상의 조경(造景)에 응용하기도 했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곡운집(谷雲集)》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성 명】 김수항(金壽恒)
【생몰년】 1629(인조 7)∼1689(숙종 15)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구지(久之), 문곡(文谷)
【시 호】 문충(文忠)
【저서·작품】 《문곡집(文谷集)》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629(인조 7)∼1689(숙종 1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이다.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종로구 옥인동(玉仁洞) 45번지의 자수궁(慈壽宮)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인조 24년(1646) 반시(泮試)에 장원하고, 진사시(進士試)에도 장원했으며, 효종 2년(1651)
알성 문과(謁聖文科)에도 장원급제한 수재로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이어 병조 좌랑 · 사서(司書) · 경기도사(京畿都事) · 지평(持平) · 정언(正言)을 거쳐 1753년에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효종 7년(165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 교리(校理) · 승지 · 부제학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지냈다. 현종 즉위년(1659)에 효종능비의 전서(篆書)를 쓴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도승지 · 예조 참판 · 이조 참판을 지냈다. 특히 1660년에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상(服喪)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宋時烈) 등과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서인(西人)이 승리하게 하고,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문을 탄핵하여 귀양가게 했다.
1662년 왕의 특명으로
예조 판서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대사헌 ·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특히 이조 판서로 있을 때는 인재등용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현종 13년(1672)에는 나이 44세에 우의정에 승서되었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었을 때 그의 형 김수흥(金壽興)과 함께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에 대하여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자 벼슬에서 물러 났다.
숙종 1년(1675) 왕의 부름을 받아 다시 좌의정에 복귀했으나
남인의 윤휴, 허적(許積) 등을 배척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 관직이 삭탈되고, 원주(原州)에 부처(付剔8되었다. 이듬해 풀려났으나 다시 영암(靈岩)에 부처(付剔8되었다가 철원(鐵原)으로 이배되었다.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 정권이 몰락하자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복귀하고, 곧이어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남인의 죄를 다스리는 동시에 송시열 · 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 들였다. 이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재임하다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체임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함으로써 그가 경신대출척 이후 남인 옥사를 다스리는데 위관(委官)으로 가혹하게 다스렸다는 죄명으로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는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 등과 짝하여 노론(老論)을 이끌었다. 숙종 20년(1694)에 다시 서인(西人)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원 복관되었으며 고종 23년(1886)에는 현종 묘정(顯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岩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특히 전서(篆書)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문곡집(文谷集)》 25권이 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文谷集, 黨議通略, 東國輿地備攷 卷2
【관련항목】
무안대군(撫安大君) 의안대군(宜安大君) 김석주(金錫胄) 김수흥(金壽興) 남이성(南二星) 박치도(朴致道) 심유(沈攸) 심재(沈梓) 이민서(李敏敍) 이홍연(李弘淵) 송시열(宋時烈) 권대재(權大載) 김덕원(金德遠) 김수증(金壽增) 김양행(金亮行) 김이익(金履翼) 김창집(金昌集) 민암(閔촒) 박태상(朴泰尙) 송상기(宋相琦) 이상(李翔) 이상진(李尙眞) 정제두(鄭齊斗) 최석정(崔錫鼎) 김창업(金昌業)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조근(金祖根)



 

 성 명】 김수흥(金壽興)
【생몰년】 1626(인조 4)∼1690(숙종 16)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자·호】 기지(起之), 퇴우당(退憂堂), 동곽산인(東郭散人)
【시 호】 문익(文翼)
【저서·작품】 《퇴우당집(退憂堂集)》, 《퇴우만필(退憂漫筆)》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학자

   1626(인조 4)∼1690(숙종 1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이다. 우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아들인데 동부승지 김광혁(金光爀)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로 1648년 사마시를 거쳐 1655년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문과중시에서 아우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병과에 거듭 급제하여 부교리 · 대사간 · 도승지 등을 지냈다. 현종 7년(1666) 호조 판서, 1673년 판의금부사가 되었고, 곧이어 우의정을 거쳐 1674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 해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가 발생하자
남인의 기년(朞年 : 만 1년)에 대해 대공(大功 : 9개월)을 주장하여 현종이 죽은 후 남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영중추부사에 임명되고, 1688년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장기(長?)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평소
송시열(宋時烈)을 숭모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 · 《어류(語類)》 등을 탐독하였으며, 저서로는 《퇴우당집(退憂堂集)》 5권과 《퇴우만필(退憂漫筆)》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退憂堂集
【관련항목】
김수항(金壽恒) 이세백(李世白)

 

 

 

 

 

성 명】 이단하(李端夏)
【생몰년】 1625(인조 3)∼1689(숙종 15)
【본 관】 덕수(德水) 이(李)
【자·호】 계주(季周), 외재(畏齋), 송간(松磵)
【시 호】 문충(文忠)
【저서·작품】 《외재집(畏齋集)》, 《북관지(北關誌)》, 〈 사창절목(社倉節目)〉, 〈선묘보감(宣廟寶鑑)〉, 《현종개수실록》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학자

   1625(인조 3)∼1689(숙종 15).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 · 송간(松磵),
판서 이식(李植)의 아들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이다.
음보로 벼슬에 나아가
공조 좌랑으로 재직 중 현종 3년(166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정언 · 부교리 · 용안 현감 ·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북평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의 사적을 조사, 관직을 추증시키고 사당을 세워 충렬사라는 사액을 내리게 하였으며, 부교리로 있을 때에는 귀양 중의 제신들의 사면을 주청하였다. 1669년 이조 정랑으로 각사(各司) 노비의 공안(貢案)을 정리할 것을 청하여 신공(身貢)을 반 필씩 감하게 하였다. 이어 교리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의 교정관이 되고, 훈련별대의 창설을 주청, 시행하게 하였다. 그뒤 응교 · 사간 · 사인 등을 역임하고, 1671년 동부승지, 이듬해 이조 참의가 되어 중종의 폐비 신씨의 신주를 신씨 본손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1674년 대사성으로 제학을 겸임하였다.
숙종 즉위 후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의 처벌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파직, 이듬해 삭직당하였다.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으로 풀려나 이듬해 홍문관 제학으로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2년 대사헌, 1684년 예조 판서가 되어 〈사창절목(社倉節目)〉 · 〈선묘보감(宣廟寶鑑)〉을 지어 올렸다. 1686년 우의정이 되어 사창 설치를 건의하였고, 죽을 죄인에 대하여 삼복(三覆)을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행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하여 힘썼으며, 사창제도를 철저히 실시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돌볼 것을 역설하였다.
조선 후기
경학에 있어서 대표할만한 학자이며, 용안(龍安)에 영당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저서로 《외재집(畏齋集)》과 편서로 《북관지(北關誌)》가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增補文獻備考
【관련항목】
심유(沈攸) 송시열(宋時烈) 이유(李濡) 허윤(許玧) 권상하(權尙夏) 

 

 

정호 [鄭澔, 1648~1736]

'고문서(古文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약
조선 후기 문신.《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유배되었다. 1725년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사화로 사사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였고, 글씨와 시문에 뛰어났다.
본관 연일(延日)
장암(丈巖)
별칭 자 중순(仲淳), 시호 문경(文敬)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장암집》,《문의통고(文義通攷)》
본문

본관 연일(). 자 중순(). 호 장암(). 시호 문경(). 감찰 경연()의 아들. 1682년(숙종 8)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정언()을 역임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어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풀려나와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98년 집의() ·사간() 등을 지냈다.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신은() 12만 냥의 취급 부주의로 파직되었다가 광주부윤()에 기용, 1702년 동부승지 ·대사성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도승지 ·부제학을 거쳐 1713년 대사성에 재임중 송시열()의 묘정() 배향을 제의하고, 1715년 부제학으로 《가례원류()》의 발문에서 윤증()을 공박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을 추탈하게 하였으며, 1717년(숙종 43) 세자의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하고, 다음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으로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강진()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사화로 사사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9년 기로소()에 들었고, 중추부영사()로 치사()하였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였고, 글씨와 시문()에 뛰어났다. 충주의 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장암집》, 편저에 《문의통고()》가 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905년 금북관찰부(충청북도)訓令(훈령)55장  (0) 2009.10.16
조선박람회 옆서  (0) 2009.06.05
택당 이식 (李植)선생의 서간 [1584~1647] 크기 59*32쎈치  (0) 2008.11.16
화서 이항로선생 간찰 유중교선생시고 제례통고등 의병장 자료  (0) 2008.07.09
종장 전 음성현감 김정곤(金貞坤)의서간  (0) 2008.07.03

TOP

Designed by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