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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화(古書畵)

(平安帖 )조두순.남병철 .서희순 등간찰첩 9장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11. 4. 19.

품   명 : (平安帖 )조두순남병철서희순 등간찰첩 9장
   시   대 : 조선후기

   크   기 : 35*44

 

조두순(趙斗淳:1796~1870)-흥선대원군과 친밀했던 영의정 ♥ 역사와 인물

2010/12/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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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은 세종때 왕의 신임을 얻어 예문관대제학에 올라 한때 정계를 주름 잡았던 명신 조말생(趙末生)의 후손으로, 본관이 양주, 그의 선대에는 시대에 따라 정치판을 장식한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조말생의 7대손 조존성(趙存性)은 인조때 호조판서로 명성이 있었고, 그의 아들 조창원(趙昌遠)은 인조의 장인으로, 관직이 인천부사를 거쳐 영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조존성의 또 다른 아들 조계원(趙啓遠)은 영의정 신흠(申欽)의 사위로, 현종 때 형조판서였는데, 이가 곧 조두순의 7대 조부였다. 그런데 조계원의 아들 대에 내려와 당파가 갈려 서로 피를 틔기는 싸움이 벌어져 가문이 흩어지기도 하였다.
조계원의 아들 가운데 괴산군수를 역임한 조희석(趙喜錫)과 그의 아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 부자는 노론, 조희석의 아우 좌의정 조사석(趙師錫)과 그의 아들 좌의정 조태구(趙泰?) 부자와 조카 조태억(趙泰億)은 소론의 지도급 인물로 부상, 권력을 다투는 지경에서 피를 나눈 형제끼리 파당의 중심에서 배척을 일삼았다. 이들은 뒤에 영조임금에 오른 연잉군(延잉君)의 세제 책봉과 세제의 대리철정을 두고 서로 싸웠는데, 일단 승리를 거둔 노론의 영수 우의정 조태채가, 곧 소론의 공격을 받아 이른바 ‘노론4대신’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기 까지 했다. 뒤에 결국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자 조태채는 관작이 모두 회복 되고 후손들도 연좌에서 풀려 벼슬길이 열렸다.
조두순은 이런 조태채의 5대손으로, 조태채의 아들 조정빈(趙鼎彬)은 종친부도정, 손자 조영극(趙榮克)은 한성부서윤, 증손 조종철(趙宗喆)은 현감, 현손 조진익(趙鎭翼)은 목사였는데, 목사 조진익이 곧 조두순의 아버지였다. 이들 조두순의 직계 선대들은 모두 영조의 등극을 돕다가 희생 된 조태채의 음덕으로,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을 얻었었다.
조두순은 순조26년(1826)년 31세 나이 때 황감시에 장원으로 뽑히고, 그 해 4월에 경과정시(慶科庭試)에 급제, 규장각대교를 받아 벼슬을 시작하였다. 경과정시는 정조임금이 처음 시행하였던 과거였는데, 국가적인 경사를 맞아 대궐 마당에서 응시자들로 하여금 경전을 암송하게 하여 임금이 직접 재능을 측정해 보는 과거였다.
조두순은 순조?헌종?철종?고종에 이르기까지 4대 임금에 걸쳐 왕을 보필하며 국정을 보살폈다. 그는 승지?대사성?이조참판?황해도관찰사?공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예문관대제학?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좌의정을 거쳐 고종2년(1865) 70세 나이때 영의정에 올랐다.
조두순은 삼정의 문란 때문에 양반 사대부들과 낭관들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방방곡곡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이를 바로 잡기위해 삼정리정청(三政釐整聽)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고, 그 총재관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여, 삼정의 개혁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이미 나라 형편은 배가 기울어져 버린 꼴이었다.
대원군을 도와 고종의 등극에 크게 힘을 보탰던 조두순은, 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경복궁 재건, <대정회통>편찬, 삼군부(三軍府)설치 등, 국정의 주요 분야 추진을 진두에서 지휘하였고, 어지러운 시세를 틈타 쌀값을 마음대로 조작하여 폭리를 취하는 좌우포도청의 턱없는 짓거리들을 엄격히 단속하였다.
고종3년(1866) 실직에서 물러난 조두순은, 기로소에 들어가 종신토록 국록을 받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대원군의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고종9년(1870)년 10월 조두순은 75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문헌공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오늘날의 충청남도 청양 화성면 용당에 그의 유택이 마련 되었다.
조두순은 조병섭(趙秉燮)?병집(秉集)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크게 들어나질 못했다. 그러나 손자대에 이르러 조병섭의 아들 조동희(趙同熙)가 구한말 농상공부대신에 올랐다. 그러나 조동희는 친일에 빠져 남작 작호를 받아 호사를 누리니 뒤가 맑지 않았다. 조동희는 아들 중헌(重獻), 손자 긍호(肯鎬)를 두었다.
탐관오리로 역사에 악명을 새긴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조두순의 형제인 조유순(趙猷淳)의 서자였고, 구한말 동학교도 탄압에 앞장서 동학혁명 원인(遠因) 제공자로 역할하고 독립협회를 핍박하는 등, 친일행각을 일삼다가 참정대신까지 올랐던 조병식(趙秉式)은 조유순의 아들로, 곧 조두순의 친 조카였다. 이리하여 조두순의 후예에는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 일본의 침략 세력을 불러 들인 장본인들과 대세를 몰아 친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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