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년(1944) 장마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지만,
어릴 적 부터 들어 온 이야기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남한강 홍수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 보니,
갑신년(1944) 장마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다만, 안성.이천.여주등 중부지역에서 피해사례가 나타난다.
어릴 적 부터 들어온 "갑신년 장마"는
한강 유역 일대의 홍수라기보다는
경기 남부와 충북 북부지역인 안성,장호원 등에 걸친
국지성 호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부의 고향인 노은에서는 72년과 90년 홍수보다도
갑신년 장마를 더 큰 장마로 말하고 있다.
어부의 고향인 노은면은 그리 험한 산골은 아니라서
홍수에 따른 재해라는 것을 모르는 곳이다.
큰비가 온다고 해도
논밭두렁이나 한포천의 제방이 조금 유실되는 정도이며,
비가 그치면 몇 시간 내에 유량이 감소하기에
농경지가 침수되는 피해도 거의 없는 지역이다.
그러나, 갑신년 장마는 노은이라는 산골짜기를 폐허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부의 외가집 동네인 우리재에서 십여채의 집들이 떠내려 갔고,
노은에서 가장 크다는 큰보뜰을 자갈밭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장마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지금은 한포천 제방이 정비되고
콘크리트 낙차보와 경지정리가 되어
갑신년(1944) 장마에 대한 흔적들이 살아졌지만,
내가 어릴적만 해도
한포천 개울가에는 자갈논과 모래밭들이 많았다.
벌거숭이로 물장구를 치던 앞개울의 추억 속에는
참나무보, 큰보들, 새보들 등에
물을 대기 위한 솔가지로 된 물막이보.
우리재, 신니, 문바위로 연결되는 섶다리.
문바위와 솟대울의 물레방아간.
방죽의 유실을 막기 위한 돌무더기를
고기를 잡는다고 파헤치다가 혼나던 일.
방죽을 따라 심어진 미루나무와 아카시아 나무.
잔디씨와 벼이삭줍기를 하러 다니던 기억.
겨울이면 앞개울 자갈밭에 설치된 가설극장과 약장수들
김영훈.장소팔.고춘자.이은관 ~~~~
나이어린 이미자의 딸 정재은과 하춘화 등
새마을 운동으로 방죽도 생겨나고 다리도 생겨나면서
어린 시절 시냇가의 정취는 사라져 갔다.
* 갑신년(1944) 장마피해 사례
원통산 관음사에서
금강암은 원통산 넘어 옛 절터(김생암)에서 원통산 절골 광대바위 받침으로 이루어진 구 절터에 옮겨져 1944년까지 있다가 갑신년 대홍수로 산사태가 이 절을 덮쳐 크게 피해를 입게되자 현재의 사찰 자리로 이전하였고 1981년도 현 주지 스님이 오면서 관음사(觀音寺)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옛 법당인 나한전과 산신당은 1970년도에 신축되었고 지금의 대웅전은 1994년도에 지장전은 1995년도에 신축되었다.
청미천 장호팔경 중 노탑귀범(老塔歸帆)에서
지금의 청미천 물건너 노탑4리 부근을 전에는 노들이라고 불렀다. 갑신년(甲申年-서기1944년) 큰 장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무성한 미류나무 숲이 하늘을 덮듯이 울창했고 강변에는 눈부실듯 하얀 모래사장이 넓게 깔려있고 청미천 맑은 물은 수량도 넉넉하여 여름철이면 동리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물고기도 흔해서 천렵들도 많이 가곤 했다. 지금은 모두 경지정리를 하여 옥답이 되었지만 이전까지 이곳 수십만평 되는 미류나무숲 사이 간간이 밭을 일구어 밭농사 참외 농사를 지어 원두막이 수십개씩 들어서기도 했다. 무성한 숲에는 매미소리가 귀 아프게 들렸고 밤이면 도깨비불이 시퍼렇게 떠 다니고 반딧불은 신비하게까지 보이기도 했다.
여름철 장마 후에 물이 늘게 되면 여강(여주강)에서 물길타고 오르는 상고배(商賣船)가 소금, 새우젓들을 싣고 올라와서 곡식과 교환해 가는 것이 이곳 풍물이었다. 노탑귀범은 이들 상고배가 흰 돛을 달고 저녁 석양머리에 붉은 노을을 흰 돛 가득히 담고 포구(지금의 큰 다리 밑)로 돌아 오는 모습이다. 이것도 중국 소상 팔경중 원포귀범(遠浦歸帆)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충주군 감미곡면(甘味谷面) 주천리(舟川里)의 마을유래(현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에서
괘월(고야리, 개월, 掛月) : 토돈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반달형이 되어 있어 달(月)이 걸린 것 같다하여 괘월(掛月)이라 부름.
골배내(內舟里) : 새터 동북쪽에 있는 마을, 냇물 지형이 행주형(行舟形)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그 배의 머무는 항구(港口)가 된다하여 배 안쪽이라는 뜻으로 배내(內舟)라 하고, 배내 안쪽이 된다하여 안쪽 골짜기의 뜻으로 골배내라 한다.
구린들(銅坪) :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갑신년(1944년) 장마로 인하여 모두 떠내려가 지금의 새터와 대둔으로 이주해 없어졌다. 30여호나 되는 동네였고 대장간도 있었으며 토질이 비옥하다.
대둔(垈屯, 대돈, 새터말) : 고야리 북쪽 도로변에 있는 마을, 최근에 마을이 새로 생겨 새터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1940년대까지는 대둔 이라 불렀다.
두집매 : 두집이 살고있는 마을.
바리고개 : 골배내에서 주천 저수지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며, 고개 밑에 있는 작은 마을. 주막거리 : 골배내 북쪽에 있는 마을.
토돈(土屯, 토둔) : 대둔 서쪽에 있는 마을, 마을터가 높은 지대가 됨으로 흙이 두둑하다는 뜻으로 토둔이라 하였다.
순위 | 발생년월일 | 최고수위 | 유량(m3/sec) |
---|---|---|---|
1 | 1925. 7. 18 | 12.26 | 34,400 |
2 | 1990. 9. 11 | 11.27 | 30,500 |
3 | 1972. 8. 19 | 11.24 | 30,000 |
4 | 1984. 9. 2 | 11.03 | 29,000 |
5 | 1965. 7. 16 | 10.80 | 26,000 |
6 | 1999. 7. 26 | 10.78 | 25,000 |
7 | 1936. 8. 12 | 10.56 | 24,400 |
8 | 1940. 7. 21 | 10.41 | 23,600 |
9 | 2006. 7. 16 | 10.22 | 25,735 |
10 | 1935. 7. 23 | 10.17 | 22,100 |
11 | 1936. 8. 29 | 10.15 | 22,000 |
12 | 1920. 7. 9 | 10.10 | 21,000 |
13 | 1995. 8. 25 | 10.00 | 25,000 |
14 | 1920. 8. 2 | 9.86 | 20,400 |
15 | 1922. 7. 30 | 9.80 | 20,100 |
16 | 1940. 9. 4 | 9.60 | 19,100 |
참고자료 - 가금면 봉황리 갑신년 수해사망자 위령비(2010년 4월 13일 촬영하여 추가함)
'우리마을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감곡 상우산업단지 조성 본격 착수 (0) | 2012.03.28 |
---|---|
[스크랩] 제1회 감곡면 주민 자치쎈터 서예교실 전시회 (0) | 2011.12.15 |
[스크랩] 햇사레 감곡복숭아 추석선물용 ‘인기’ (0) | 2011.09.04 |
[스크랩] 음성 철박물관 특별전시 지원관 선정 (0) | 2011.09.04 |
[스크랩] 음성 감곡면, 햇사레 복숭아 직거래장터 운영 (0) | 2011.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