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서(古書)

장수황씨족보.방촌선생문집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8. 5. 4.

 품     명    장수황씨족보(長水黃氏族譜)10책
크     기    23*35쎈치
황경원, 1709~1787서문

 

백과사전 홈 > 지역 > 아시아 > 북한 > 황해북도 > 개성특급시
황희 [, 1363~1452]
요약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본관 장수()
방촌
별칭 자 구부(), 초명 수로()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황해도 개성()
주요저서 《방촌집(판)》
황희선생영당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경기기념물 제29호.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며 대표적인 청백리인 방촌 황희(1363~1452)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호를 따라 방촌영당이라고도 한다.
본문

본관 장수(). 자 구부(). 호 방촌(厖 ). 초명 수로(). 시호 익성(). 개성() 출생.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경기도도사(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예조·이조 등의 정랑()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이 되고 교하()로 유배, 다시 남원()에 이배()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예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厖), 상주()의 옥동서원()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이 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