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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古書)

양촌 권근선생문집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7. 7. 24.
1. 조선 개국전의 정치활동
1368년(공민왕 17)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 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 조선 개국초의 정치활동·관력
1393년(태조 2)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는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사람들로부터 유문(鎪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고,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 중시(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