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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古書)

퇴계 이황선생문집권지24-25권1책

by 골동품 고서 고문서 근대사 갤러리 진품명품 2007. 8. 2.

퇴계 이황선생문집권지24-25권1책  琴思愼 의소장본

 

퇴계선생문집 ≫은 1599년(선조 32)에 문인 조목 등에 의하여 수집·간행된 후에 누차 중간본이 나왔다. 이 책은 ≪퇴계전서≫란 이름으로 1915∼16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인(刊印)된 적이 있고 1958년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본으로 간행된 것도 전해지고 있다.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권두에 총목록과 세계도가 있다. 1권에는 시 216수(過吉先生閭, 月影臺 등)가 있다. 2권에는 시 206수(和老杜幽人 등)가 있고, 3권에는 시 264수(秋日遊陶山夕歸 등)이 있다. 4권에서는 시 126수(書院十詠 등) 그리고 5권에는 시 185수(挽權同知應昌 등)가 있다. 6권에는 교 3편(敎咸鏡 道巡邊使李浚慶書 등), 소 5편(甲辰乞勿絶倭使疏, 戊午辭職疏, 戊辰六條疏 등)이 있다. 그 중 소 5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갑진걸물절왜사소」는 당시 북쪽 오랑캐와도 사이가 좋지 못한데 왜국과의 사이에도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으니 사신을 받아들여 유화책을 써야 한다는 글이고 「무진육조소」는 계통을 중히 할 것과   참소와 이간을 막을 것, 성학을 숭상할 것, 도술을 밝힐 것, 복심(腹心)을 미루어 민정을 잘 살필 것, 수성을 정성되게 할 것 등의 6조를 들어 시정 의 요점을 논했다. 칠 권에는 차 9편(戊辰經筵啓箚, 進聖學十圖箚, 乞致仕歸田箚子 등), 경연강의 2편(乾卦上九講義, 西銘考證講義), 계의 2편(擬上文昭殿議 등)이 있다.팔 권은 사상 계사 60편(辭豊基郡守上監司狀, 大提學謝恩後辭免啓 등), 서계수답 3편(禮曹答對馬 島主宗盛狀, 禮曹答日本國左武衛將軍源義淸 등)이 있다. 9권에서 40권까지 서(書)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서에는 시사 문후 교훈에 관한 서신도 많이 있으나 경전상의 성리학에 관한 것과 예의에 관한 것도 상당수이다. 41권에는 성리학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나 왕양명 의 ≪전습록≫을 변박(辯駁)한 글도 실려 있다. 42권은 서(序) 5편(朱子書節要序, 啓蒙傳疑序, 成王皇華集序, 鄕立約條序 등)과 기(記) 10편(丹陽山水可遊者續記, 景福宮重新記, 伊山書院 記, 易東書院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43권은 발(跋) 28편(書漁父歌後, 書晦菴詩帖後, 延平答問後語, 陶山 十二曲跋, 新刊啓蒙翼傳跋 등)이 있고, 44권은 잠명(箴銘) 4편(靜存齋銘, 題金士純屛銘 등), 표전(表箋) 11편(中朝冬至賀表, 本朝誕日箋 등), 그리고 상량문(上樑文) 2편(思政殿上樑文 등)이 있다. 45권은 축문 제문 48편(國內山川祈雨文, 雩祀后土氏祈雪文, 熊津祈晴文, 祭趙松岡文 등)이 있으며 46권은 묘갈지(墓碣誌) 명(銘) 23편(先考成均進士碣陰紀事, 先비贈貞夫人金氏墓碣識 등)이 있고 47권에는 묘갈지명(墓碣誌銘) 16편( 曾祖考비墓碣識 등)이 있다. 48권은 행장(行狀) 4편(明宗大王行狀, 靜菴趙先生行狀 등)있고 사십 구권은 행장 (行狀) 3편(晦齋李先生行狀, 先府君行狀草記 등)이 있다. 이에 이어서 제28책은 별집으로 시 267 수(竹嶺途中遇雨, 春日閒居偶興 등), 29책은 외집으로 시 110수(紅梅韻, 玉堂憾梅 등) 가 실려 있다. 이어서 연보가 있다. 1권은 1501∼1560年間 記事, 年譜 2권은 1561∼1570년간의 기사와 그 후 1596년 지석을 묻을 때까지의 記事가 실려 있다. 부록으로 3권은 언행총록과 저자가 저술하고 기대승이 후서한 묘지명과 기대승이 쓴 묘지와 교서 2편, 제문 7편( 遣承旨致祭文, 遣禮官致祭文과 盧守愼, 奇大升, 具鳳齡, 趙穆 등의 祭文), 조목이 쓴 도산서원봉안문과 축문, 박승임이 쓴 이산서원봉안문, 유성룡이 쓴 여강서원봉안문, 매지고문, 각천연대고문 등이 있다. 권미에는 유성룡이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

<사회 문화적 의의>
이황의 초명은 서홍이며 자는 경호, 초자는 계호, 호는 퇴계 도옹 ·퇴도 청량산인이라 하고 본관은 진보이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이이와 함께 유학계에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이원론을 반박하고 나선 기호학파에 대하여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풍기군수로 있을 때 교육사업에 관심을 두어 주세붕이 세운 백록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리게 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게 하였고 또한 도산서원을 창설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심했다. 붕당의 폐해를 상소하고 현실 과 학문의 세계와를 엄격히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적인 태도에만 철저했다. 그는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겸허한 성격의 대학자로 중종 명종 선조 등 역대 임금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